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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를 만나다

역발상(逆發想). 원래 국어사전에는 없는 단어다. 생각이 떠오른다는 ‘발상’에 ‘거꾸로’라는 ‘역’이 더해져 만들어진 조어(造語)다. ‘발상’, 즉 원래 있는 생각과 반대로 생각해 보라는 의미다. 의례적인 사고를 탈피하라는 뜻으로도 자주 쓰인다. 뜻밖의 아이디어가 히트상품을 만들고 행정혁신을 이룬 사례가 속속 알려지면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필수덕목이 돼버렸다.

강연 중인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

 

반전의 삶에 대한 헌사 ‘역(逆) 창(創) 락(樂)’

 

 

역발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맥키스컴퍼니 조웅래(55) 회장이다. 술 만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건강과 휴식을 떠들고 다니니 그보다 역설적인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004년이었다. 다니던 신문사에 3부작으로 향토 소주회사 선양의 30년 비사(祕史)를 탈고(脫稿)한 직후였다. 그는 무너져가던 소주회사의 인수자 자격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창업영웅’으로 통하던 벤처기업 1세대, 그런 사람이 소주회사를 사들이다니! 가치관의 혼돈이었다.

‘왜?’라는 물음에 그는 “점유율이 낮으니 다시 높아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정작 그와 얼굴을 맞대고 인터뷰를 한 건 2012년 9월초였다. 우리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관심이 컸을 때였다. 작정하고 사람들을 만났고 ‘CEO 리더십분석’이란 기획시리즈를 연재했다. 그는 내가 만난 첫 기업 CEO였다. 그리고 그의 리더십을 ‘역(逆) 창(創) 락(樂)’으로 정의했다.<2012년 9월 2일, 디트뉴스, “반전의 삶, 대중을 즐겁게 하라”> 뒤집어 생각하니(逆) 새로운 일이 비롯되고(創) 이로써 대중을 즐겁게(樂) 한 그의 삶에 대한 오마주(헌사)였다.

 

3년여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지난 5월 22일 오후 대전 서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2015년 서람이 자치대학’에서다. ‘역발상을 다시 역발상하라’는 주제의 강연이었다.

 

“창조란 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호기심가지고 해보는 게 창조입니다.” 그의 강연이 시작됐다. 역(逆)으로부터 창(創)하고, 락(樂)으로 귀결된 그의 인생 이야기는 3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가 무미건조한 대전을 판매하는 최고의 도시마케터가 돼 있었다는 점이다.

 

KT 전화선을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활용

그는 공대를 나왔다. 대기업 엔지니어로 취업했지만 곧 그만뒀다.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아서였다. 존재감 있게 일해 보려고 중소기업을 찾아갔지만 또 그만뒀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회사가 관심을 안 보여서다. 애초부터 그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화기가 다이얼에서 버튼 식으로 바뀌고 유선망 보급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다방에서 그의 눈에 운세 재떨이가 들어왔다. 불현 듯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 운세였다. 침대 밑에 기계를 놓고 음성으로 운세를 제공하는 700-8484(팔자팔자) 서비스를 시작했다. 1인 기업이었다. 단소 소리를 배경으로 인기 중국드라마 ‘포청천’의 성우가 운세를 알려줬다. 처음 성공을 맛봤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소리를 들려준다’는 발상의 전환은 삐삐, 휴대폰으로 이어졌다. 무선호출기, 이른바 ‘삐삐’가 보급되면서부터다. 삐삐 사서함에 음악을 저장해 놓으면 목소리와 멜로디가 함께 나왔다. 이를 기반으로 휴대폰 벨소리와 컬러링도 선보였다. 크리스마스카드 대신 ‘700-5425’를 통해 캐럴송을 선물할 수도 있었다. 음악으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발상에 대중은 열광했다.

 

‘봉이 김선달’ 식 발상의 과학적 실현

 

조웅래 회장의 강의는 매번 '뻔뻔(Fun Fun)한 클래식'의 여주인공인 소프라노 정진옥의 '뻔뻔한' 가곡으로 시작된다.

 

‘5425’는 국내 모바일콘텐츠업체 부동의 1위였다. 브랜드 위상을 지키기 위해 연매출의 1.5배가 넘는 자금을 광고비로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신사업 구상에 골몰했다. 일종의 출구전략으로도 해석된다. 유선망을 강력한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이용했지만 무선망은 개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 더구나 스마트폰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속가능한 사업을 찾고 있던 그의 눈에 대전‧충남의 향토소주회사인 ㈜선양이 들어왔다. “소리든 술이든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점유율이 낮으니 높일 수 있다고, 망해가니까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IT 벤처신화 주인공의 생뚱맞은 변신이었다.

 

당시 선양은 ‘은(銀) 충진 여과공법’과 국내 최초 알코올 21도의 ‘새찬’을 출시해 점유율 상승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는 대표이사(회장) 취임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찬’ 생산을 중단시켰다. 대신 ‘오투린’을 내놨다. ‘산소가 3배 많아 30분 먼저 깬다’는 광고 카피와 함께 등장해 지금까지 장수하고 있는 제품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마시는 산소(O2)를 소주에 넣다니! 대동강 물 팔아먹은 현대판 ‘봉이 김선달’ 아닌가! 그런데 ‘산소 용존 기술’이란 특허를 국내외에서 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기술은 국내 연구진에 의해 세계적 학술지에도 소개됐다. 산소를 소주에 넣겠다는 발상도 그에게서 나왔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포항심층수를 마셨더니 술이 빨리 깼어요. 알고 보니 산소가 30피피엠(ppm) 들어가 있더라고요. 산이나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면 덜 취하고 빨리 깨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그가 ‘유레카’를 외친 순간이었다.

 

소주회사를 에코힐링 기업으로

계족산 맨발 축제.

 

그는 서서히 자신의 ‘끼(氣)’를 회사 경영에 이식시켜나갔다. 대표적인 게 계족산 황톳길 조성.

 

 

어느 날 마산고 시절 자취집 친구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그는 매력에 흠뻑 빠져 지내던 계족산으로 친구들을 데려갔다. 하이힐을 신고 있던 여자 친구에게는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줬다. 그리고는 맨발로 자갈이 섞인 산길을 다섯 시간이나 걸었다. 발이 성할 턱없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몸 전체가 후끈거리고 잠도 푹 잤다. ‘맨발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감탄과 함께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발바닥에 모든 장기가 연결돼 있다고 하잖아요?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이 잘 되고, 불면증, 우울증, 붓기, 생리불규칙 등에 좋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발 벗기를 꺼려하죠. 발에 상처가 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신발을 벗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곧 산길의 자갈부터 걷어냈다. 그리고는 마사토를 깔았다. 거칠거칠한 게 촉감이 좋지 않았다. 색깔도 예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다시 황토를 깔았다. 붉은 색이 사람의 몸에 가장 빨리 반응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게 편안했다. 햇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느낌도 새로웠다. 낙엽이 떨어져 황토에 자국을 남기면 그대로 그림이 됐다. 그렇게 황토가 깔린 길이 14.5㎞나 된다.

 

이제는 사람들을 계족산으로 모이게 만드는 일만 남았다. 그는 사람들이 함께 걷고 뛰는 행사를 기획했다. 마사이마라톤. 하루에 3만보 이상을 맨발로 걷는 마사이족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자연(ecology)과 치유(healing)를 합친 ‘에코힐링(Ecohealing)'이란 개념을 만들어 상표권까지 등록했다. 소주 만드는 회사가 ’에코힐링 기업‘이 된 것이다. IT 벤처신화 주인공의 변신만큼이나 짜릿한 반전이다.

 

‘익사이팅 대전’ 만들어 알린 도시마케터

 

황톳길 조성, 음악회, 축제 등의 콘텐츠가 가미되면서 계족산은 대전의 최고 명물이 됐다.

 

사람들이 많이 와 걷고 나면 황톳길이 굳어지기 마련이다. 비만 오면 흙이 쓸려나갔다. 그래서 새벽이면 황톳길을 뒤집고, 물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고용한 직원들이다. 그는 매일 새벽 계족산을 오르며 황톳길을 살펴본다. 언제부턴가 그에게 ‘황톳길 작업반장’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그의 명함 한편, 캐리커처 아래에 이런 직함이 쓰여 있다.

 

 

맨발로 걷다가 그냥 헤어지는 게 싫었다. 언제나처럼 생각하나가 불현 듯 떠올랐다. ‘산속에 성악가와 피아노를 올려보자!’ 그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름다운 소프라노’ 정진옥을 단장으로 맥키스오페라단이 창설됐다. 숲속에 상설공연장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선 4월 둘째 주부터 10월말까지 매주 토, 일요일 오후 3시면 어김없이 ‘뻔뻔(Fun Fun)한 클래식’을 만날 수 있다. 정장 입고 음악회 가는 2%의 국민이 아니라 티셔츠 차림의 98%를 위한 공연이다. 3대가 함께 깔깔거리며 즐기는 음악회다. 클래식과 뮤지컬, 연극, 개그가 어우러진.

 

산속음악회와 축제 등 문화콘텐츠가 가미되면서 계족산 황톳길은 대전의 최고 명물이 됐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 3위’(한국관광공사), ‘5월에 꼭 가봐야 할 명소’(한국관광공사), ‘여행 전문기자들이 뽑은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33’, ‘지방자치단체 e-Marketing Fair 여행 부분 대상’(G마켓) 등은 계족산의 위상을 증거 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일을 사업가가 했으니 그는 박수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세계 언론에도 잇따라 대서특필됐다. 세계 4대 뉴스통신사 중 하나인 AFP가 2008년 5월 맨발축제를 전 세계에 타전했고, 일본 NHK 등이 현장 스케치한 축제 영상을 주요 뉴스 시간에 내보냈다. 한국관광공사는 15개국 27개 해외지사를 통해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계족산 맨발축제를 소개했다. 무미건조한 대전이란 도시가 국내외에 이만큼 흥미진진한 도시로 각인된 적은 없었다. 2009년엔 아프리카 세이셸공화국 대통령이 황톳길을 맨발로 걸었고, 대전시장 답방 때 알다브라 육지거북, 일명 ‘세이셸 코끼리 거북’ 한 쌍을 선물했다. 이 세계적 희귀동물 한 쌍에는 무병(암컷 88세)과 장수(수컷 100세)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현재 대전동물원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계족산 황톳길이 대전의 명물이 되면서 덩달아 그도 바빠졌다. ‘역(逆) 창(創) 락(樂)’을 배우려는 대학과 공공기관, 기업 등이 그에게 특강을 청했다. 2007~2010년까지 64건이던 외부강의는 2011~2014년 225건으로 3.5배나 늘어났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전국을 누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계족산과 대전을 홍보한다. ‘뻔뻔한 클래식’의 여주인공이 정말 뻔뻔하게 이태리 가곡을 들려주면, 그가 등장해 경상도 억양으로 대전을 이야기한다. 대전이 익사이팅해 지는 순간이다.

 

공유가치 창출이 기업 활동의 최우선

 

그는 전경련 초청으로 대기업 회장들 앞에서도 강연을 했다. “요즘 반 기업정서를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기업이 많다. 계산기가 아닌 가슴으로 사업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이건산업 박영주 회장이 남긴 강평이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CEO란 사람이 황토 깔고 관리하는 데 몰두하니 처음엔 다들 미쳤다고 했다. 그 자신도 힘들고 불안했다. 그 때마다 ‘단숨에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자위했다. 그러면서 1년, 2년, 그는 사람들이 계족산과 맨발에 열광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이 벌인 일에 열광하는 대중을 보며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여배우를 모델로 쓰지 않아도, 판촉행사를 하지 않아도 산소 넣은 소주 ‘오투린’은 더 잘 팔렸다. 최근 수년 간 꾸준히 6~10%의 매출 신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사업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흔히들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이 중요하다고 한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하고 남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게 아니라, 기업 활동 자체를 사회적 가치 창출에 두고 동시에 이익도 취한다는 의미다. 그가 그렇게 한 기업인이다. 그는 소주회사의 최고경영자지만 원래 있던 계족산에 황톳길, 음악회, 축제 등 공공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해 제공했다. 소주 팔아 번 돈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있는 돈으로 그렇게 하면서 소주를 팔았다는 얘기다.

 

조웅래 식 가치관경영 ‘여(慮) 신(信) 공(共)’

 

발상의 전환이 창조가 되고, 그것이 대중의 즐거움과 공유가치기가 되기까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신뢰를 얻는 인내가 필요했다.

 

그는 뒤집어 생각함으로써 창조하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역(逆) 창(創) 락(樂)’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생각, 창조, 즐거움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을지, 대중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기 위해 쉼 없이 궁리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배려심이다.

 

 

배려하는 마음이 꾸준하면 신뢰를 얻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곧 제 풀에 꺾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계족산이 좋아서, 더 많은 사람이 올 때까지 오히려 더 생각하고 더 일을 벌였다. 행동에 변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의 진정성을 믿게 된 것이다.

 

맨발문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처음엔 신발 벗기를 모두가 꺼렸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게 됐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주니(慮) 신뢰가 쌓이고(信) 비로소 함께 하는(共) 문화가 형성된 셈이다. 발상의 전환이 창조가 되고, 그것이 대중의 즐거움과 공유가치기가 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여(慮) 신(信) 공(共)’, 조웅래 식 가치관경영이다.

Posted by Paul Félix

 

 

전교생에게 한 학기 1인 평균 324만원의 장학금을 주는 대학, 행정학과를 신설하고 7년 만에 행정고등고시 합격자를 3명이나 배출한 대학, 졸업생 10명 중 1명 이상을 해외 유명대학원에 유학 보내주는 대학, 2006년 첫 졸업식 이후 매년 지역인재추천 6~7급 공무원 합격자를 배출하는 대학,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연구 사업에 선정돼 10년간 80억 원을 지원받는 대학, 교육과학기술부가 주관하는 교육역량강화사업에 5년 연속 선정된 대학….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에 위치한 금강대학교(金剛大學校) 이야기다. 대한불교 천태종(天台宗)이 중창조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의 유지를 받들어 2002년 세운 대학이다. ‘작지만 강한 대학’이 뭔지를 보여 준 이 대학이 7일 개교 10주년을 맞았다.

 

이 대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불교학에 기반을 둔 인문학의 세계적 대학”이다. 이는 철학에 눈을 뜬 20살 평범한 공대생의 삶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어느 날 우연히 철학 강의를 도강(盜講)하고는 45년 간 ‘한국철학의 세계화’라는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이야기다. 불교를 공부하지 않고는 한국철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청년은 지금 백발이 수북한 노(老)학자가 돼 있다.

 

그런 그가 금강대를 이끄는 최고경영자가 된 것은 필연(必然)이고 종단(宗團)의 예지(叡智)다. 종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소수정예 교육으로 특성화한 대학이니 그는 한 걸음 종착역에 근접해 있는 셈이다.

 

그는 정병조(鄭柄朝·65) 총장이다. 정 총장을 계룡산에서 뻗어 나온 향적산(香積山) 중턱의 금강대 교정에서 만났다.

 

고려대 공대 2학년이 우연히 철학 강의 듣고
한국철학 세계화 꿈꿔 “원효․의상? 불교부터!”

 

 

그는 고려대 공대 기계학과 65학번이다. 암울한 사회분위기를 탓하며 대폿집을 드나들었다. 공학 공부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2학년을 마친 겨울 어느 날이었다. 이 날도 괜스레 싱숭생숭했다. 동숭동 대학로로 갔다. 서울대 다니는 친구를 꾀어 대포나 한 잔 하자는 심산이었다. 당시 서울대 인문대가 이곳에 있었다.

 

웬 걸 친구는 유명한 철학교수 강의가 있다며 그를 잡아끌었다. 친구와 옥신각신 끝에 결국 강의실로 향했다. 도강 신세인 터라 맨 뒷자리에 앉아 교수를 기다렸다. 그 교수는 고(故) 열암(洌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 선생이다. 선생은 노자의 <도덕경>과 칸트를 오갔다. 칠판에 한자를 쓰다가, 독일어, 영어를 썼다. 내키지도 않았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의 머리를 때린 건 선생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선생은 “한국철학을 세계화시키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며 강의를 마쳤다. 20살 공대생은 이런 생각을 했다. ‘측우기, 금속활자가 서양보다 몇 년 빠르다고 배우며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나. 한국철학도 세계적 위상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게 한국철학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다.

 

서점에서 한국철학에 대한 책을 이것저것 사서 읽었다. 하나하나 개념을 이해하려 했지만 벽에 부딪쳤다. ‘불교를 모르면 한국철학을 이해할 수 없겠구나! 하긴 원효와 의상이 모두 중이 아니던가!’ 그 때 그는 불교의 ‘ㅂ’자를 처음 입 밖으로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태신앙이었다. 집안사람 대개가 목사 아니면 장로, 권사였다.

 

그는 무작정 종로5가에서 동국대까지 걸어갔다. 그리고는 학적과에 입학문의를 했다. 학적과 직원은 그에게 “뭣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고려대 공대생이라고 했더니 ‘미친놈’ 취급을 하는 눈치다. 그러면서 “편입시험을 보라”고 했다. 그는 ‘편입생’이란 말 자체가 싫었다. 동국대 후기 입학시험까지는 1개월 남짓 남아 있을 때였다. 다른 과목은 만만했는데 영어, 수학은 영 자신이 없었다.

 

고민을 하면서 걷노라니 을지로 4가에 와 있었다. 눈에 SPS학원이란 간판이 들어왔다. 그는 학원 상담교사에게 속성으로 입학시험을 준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속성이라도 석 달은 공부를 해야 한단다. 세 달치 돈을 내고 국․영․수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그렇게 인도철학과에 합격했다. 67학번이니 이 학과 2기생이다.

 

개종 안 한다 설득,
목사·장로 집안서 동국대 철학도 변신

 

 

 

입학시험은 합격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온 집안이 들고 일어났다. “기독교집안에서 잘못된 아이가 나왔다”며 난리가 났다. 집안 어르신들은 그나마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던 그의 선친을 압박했다. 그는 일가친척이 다 모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절대 개종(改宗)은 안 하겠습니다. 공부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제발…”

 

인도철학과의 입학정원은 20명이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됐더니 다들 법학과니 경영학과로 전과해버렸다. 8~9명이 남았는데 그만 속인(俗人)이고 나머지는 모두 스님이었다. 주말이 되면 친구 절에 가서 놀고, 방학이면 친구 절에 가서 살았다. 배우는 게 불교이고 친구가 스님이니 개종을 안 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애초부터 지켜질 수 없었다. 4학년 쯤 됐을 때 그는 스스로 느꼈다. ‘내가 불자가 됐구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그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그는 불교학으로 성공해보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인도철학과를 선택한 건 잘 한 일이었다. 당시 교수들은 고대 인도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처가 인도에서 태어났으니 인도에서 쓰던 고전어를 알아야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터다.

 

동국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소장학자로 불교학계에 데뷔한 그는 불교의 원류를 파헤치는 데 몰두했다. 석가의 불교는 무엇인가, 중국 불교와는 어떻게 차별화되느냐가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또 한국불교는 어떻게 변류했는지, 불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는 과정 등에 그의 초기 저술이 집중됐다. <인도철학사상사>, <인도의 고전>, <바가바뜨기이타와 법화경의 비교연구> 등이다.

 

그가 50대에 접어든 1990년대는 한국불교가 현대화의 물결에 휩싸이던 때였다. 불교계의 화두도 세계화였다. 중견학자로서 그는 한국불교를 어떻게 하면 현대화할 수 있을지에 천착했다. 그의 저술도 불교의 현대화, 계율의 현대적 해석 등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2000년대 이후 원로학자로서 그는 한국불교를 어떻게 하면 세계적 위상으로 위치시키느냐에 매진했다. 영어로 저술활동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철학의 세계화가 평생소원”이라던 열암 선생의 염원이기도 했다. 문광부에서 <Korea Background Series>를 발간했는데 그 첫 번째 권이 그가 쓴 <한국의 종교>다. 그는 이 책에서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 기독교 등을 모두 다뤘다. <History of Korean Buddhist Thought(한국불교사상사)>, <Master Wonhyo(원효성사)> 등도 영문 저술이다.

 

동국대 교수시절 그는 종교인연합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한신대 김경재 목사, 서강대 김승혜 수녀, 성균관대 최근덕 교수가 각각 개신교, 가톨릭, 유교를 대표했다. 불교에서는 그가 참여했고,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교수가 함께 했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씩 모여 토론을 벌였고, 공동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령 목사, 월주 스님이 젊은 학자들이 수고한다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들은 수십 년간 종교를 초월한 사회운동 시민운동에 앞장서온 우리 사회의 거목이기도 하다. 이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밥 사먹으라고, 책 내라고 돈까지 줬다. 그는 “앞으로 후배들이 이런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흔히 상생(相生)이란 말을 쓴다. 종교가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공동의 가치를 개발해 같이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응용불교’ 새 지평 개척
한중일 불교교류 황금기 열고 한국불교 세계화 나서

 

 

“미래의 불교학은 응용불교 쪽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했던 그는 금강대 총장에 취임하고 응용불교학과를 신설했다. 현대사회에서 야기되는 복잡한 갈등의 실타래를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결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는 셈이다.

 

그는 “아직은 낯설고 생소하겠지만 불교경제학, 불교사회학, 불교심리학, 불교윤리학 등을 개척해 이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류의 고뇌가 무궁할수록 응용불교의 영역 또한 무한의 공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불교가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지 사회가 불교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고도 했다. 내년 3월에는 불교특수대학원도 개설할 예정이다.

 

한국불교 발전과 세계화를 위한 행보도 발 빠르다. ‘고려대장경 천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상월원각대조사 탄신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성공리에 치렀다. 지난 6월에는 중국 런민(人民)대, 일본 도요(東洋)대와 함께 ‘불교의 동아시아적 변용’이란 주제로 공동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들 세 대학은 향후 10년간 매년 학술대회를 함께 열기로 했다. 동아시아 불교교류의 황금시대를 새롭게 열었다는 평가는 이 때문이다.

 

그는 “SCI급 논문을 많이 내고 인용빈도가 높아져야 세계 유수의 인문학 대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금강대에서 나오는 불교잡지와 저술도 되도록 영어로 출판하고 싶다”고 했다.

 

지역사회의 인문학 메카로서의 역할도 자처하고 나섰다. 지난해 논산과 올해 상반기 계룡에서 열었던 ‘금강아카데미-인문학 시민강좌’를 지난 9월부터는 천안에서 개최하고 있는 것. 정 총장은 지난 9월 5일 ‘한국인의 종교수용,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첫 강연을 펼쳤다. 그에게 시민강좌를 압축해서 들려달라고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교학에 기반 둔 인문학의 세계적 대학 만드는 게 삶의 종착”

 

 

 

“우리나라 인구의 60% 정도가 종교인이다. 사람이 왜 종교를 갖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구원받기 위해, 해탈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쓰지만 일반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정말 행복하려면 종교를 믿는 태도가 건전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수용 행태에 문제가 있다. 빈곤층의 종교수용 태도는 대개 종교적 신념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데 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종교적으로 풀어보려는 것이다. 중산층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절이나 교회에 가서 귀를 씻는다. 착해지는 기분이 든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권층은 종교를 액세서리쯤으로 여긴다. 필요에 의해 종교를 바꾼다. 모든 종교에 관대한 척 위선을 보인다. 지하철 요금이 1200원에서 1300원으로 올라 서민들은 난리인데 이들은 관심도 없다. 택시타면 되고 외제차 타면 그만이다. 이들이 진짜 무서워하는 건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예수님께 비는 것이다. 죽어서도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전하게 믿는다는 건 어떤 것이냐? 우리나라는 종교전쟁의 무풍지대라고는 하지만 개신교가 옳다, 불교가 옳으냐를 따지는 건 전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내가 믿는 종교를 실천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다른 종교를 비판할 시간이 어디에 있나? 모든 종교인들은 각자 표방하는 진리의 세계에 얼마나 가까이 근접하느냐를 가지고 승부해야 한다. 사당이나 교회 수로 경쟁하면 안 된다. 목탁치고 산 속에 있으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부처님의 진리에 얼마만큼 다가서느냐, 또 이를 사회에 어떻게 사회에 환원시키느냐가 미래 불교다. 믿는데 그치지 말고 현실에 응용해야 한다.”

 


 

정병조 총장은?

 

1947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 교동초, 서울사대부중, 서울사대부고를 나왔다. 고려대 공대에 65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 67학번으로 입학했다. 영남대 철학과에서 문학석사를, 동국대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부터 31년간 동국대 윤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3년간 인도 네루대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동국대에서 교무처장,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을 지냈다. 현재 불인상(不仁賞) 심사위원장, (재)보덕학회 이사 겸 감사, 불교연구회 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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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측정 지능지수(IQ) 152, 만26세 8개월에 문학박사 학위,

38세 등재논문 60편, 저서 11권...학술재단, 대기업 등 앞 다퉈 펀딩

 

철학․윤리학 25개, 불어․불문학 16개, 독어․독문학 13개…. 지난 12년 간 전국 4년제 대학에서 사라진 학과의 수다. 지난 7월 한국대학연구소가 1999년 대비 2011년 계열별 학과 현황을 분석한 자료다. 같은 기간 대학 24개가 신설되고 학생 수가 33만 명(30.3%)이나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인문계열 학과들이 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시장논리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벌어진 인문학의 대재앙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 스타’가 혜성같이 등장했다. 고교시절 측정한 지능지수(IQ) 152, 박사학위 취득 시 나이 만 26세 8개월,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및 등재후보지 게재 논문 60편, 학술저서 11권, 학술문화재단 및 자치단체, 대기업 산하 문화재단들이 앞 다퉈 연구를 펀딩하는 한국학의 후속세대, 밥 먹고 숨 쉬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연구만 할 것 같은 대전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권도경(38) 교수다.

 

사실 권 교수는 석사학위 논문을 내면서부터 ‘대성할 기미’를 보였다. <조선후기 통속적 한문소설 연구>란 논문이었는데 ‘통속적 한문소설’이란 개념 자체가 그에 의해서 처음 만들어진 것. 지금은 이 개념이 고대학파(고려대)를 중심으로 일반화됐다.

 

박사학위 논문은 그를 단번에 ‘예비스타’로 만들었다. <조선후기 애정전기소설 변심 주지 연구>라는 논문에서 주류학계의 이론을 뒤집은 결과를 내놨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국내 전기소설사에 ‘변심(變心)’이란 개념은 없었다. 한국 전기소설이 중국과 다른 특징으로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었던 것. 그는 곧 학위 논문과 이후 연구논문을 종합해 <조선후기 전기소설사의 전변과 새로운 시각>이란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 책은 ‘2005년도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학술도서’가 됐다. 그의 이론이 공인을 받은 셈이다.

 

우리가 권 교수에 주목한 건 인문학적 가치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현실, 즉 고전독서법을 핵심으로 하는 인문학적 가치가 ‘효용성’에 의해 주변으로 떠밀려나가는 현실 속에서 이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그를 대전대 30주년기념관 7층 연구실에서 만났다.

 

권 교수가 최근 발표한 논문은 세계유네스코위원회 주관으로 오는 11월 1~3일 부산 벡스코(Bexco)에서 열리는 제2회 세계인문학포럼에서 포스터세션에 선정됐다. 인문학포럼을 대표할만한 논문으로 인정받아 개최 장소에 포스터를 부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다. 단 4명의 학자만이 이런 영예를 누릴 수 있다. 베니스영화제로 치면 황금사자상에 노미네이트된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포럼에는 전 세계 인문학자 2천여 명이 참석한다.

 

권 교수가 이번 포럼에서 발표할 논문은 <병란(丙亂) 트라우마(trauma) 대응 고소설에 나타난 향유층의 집단서사와 영화 최종병기 활(Collective Epic Narrative of Classical Novel Responding to Trauma of the Manchu War of 1636 and Contemporary Version)>이다. 여기서 향유층이란 작품 공급자와 수요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논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권 교수의 중점 연구대상은 최근의 영화나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등을 고전작품의 현대적 이본(version)으로 규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사유전자’, ‘서사원형’, ‘서사코드’ 같은 개념을 창안했다.

 

<최종병기 활>은 지난해 국내영화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이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2006년 멜 깁슨(Mel Gibson)작 <아포칼립토(Apocalypto)>와의 유사성 때문에 혹평을 받았다. 권 교수는 “작품 간 유사성만을 강조한다면 대중을 지나치게 우매하게 보는 것”이라며 “700만 명 이상의 대중이 열광했다면 분명히 다른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내재돼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규명하기 위한 ‘서사원형’을 고소설의 집단서사에서 찾았다. 영화의 배경은 병자호란. 병란은 중세시대 조선의 집단 정신구조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했던 중국에 대한 억압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을 뜻하는 정신분석학 용어)라는 것. 그는 “병란이 임란보다 전쟁기간은 짧았지만 조선은 일본보다 중국과의 관계망 속에서 존재했고, 중화질서에 대응하며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인문학적 가치가 ‘효용성’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나는 현실 속에서

두 상반된 가치 융합 가능성 제시...디지털시대 인문학의 화려한 부활

 

병란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조선의 지식사회는 서인을 중심으로 한 북벌론과 중국을 먼저 배우자는 북학이론(개혁주의)으로 나뉘었다. 이는 지배계층의 현실적인 대응담론이었다. 그렇다면 살해, 강간, 방화 등 극단적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민중들은 어땠을까? 이들의 대응담론은 설화나 소설을 통해 허구적으로 드러났다. 권 교수는 <강도몽유록>, <임경업전>, <박씨전> 등의 서사문학에서 병란 트라우마가 민중에게서 어떻게 구현됐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자기치료가 이뤄졌는지를 분석했다.

 

<강도몽유록>은 병란당시 강도(강화도)에서 죽임을 당한 원귀들이 병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집권층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집권층과 민중 사이에 위치한 지식인이 쓴 소설로, 엄밀하게 말해 민중의식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게 권 교수의 해석이다. 그는 “문학치료적 관점에서 가장 초보적인 단계인 발화(發話), 즉 자신의 상처를 상담가에게 발설함으로써 치료가 비롯되는 단계”라고 했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를 끄집어내는 단계에 위치해 있는 작품이 <강도몽유록>이다.

 

트라우마를 치료하려면 청나라와 대등하게 싸워야 한다. 그 중간단계에 있는 서사구조를 보여주는 작품이 <임경업전>이다. 이 소설에서는 임경업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해 퇴각하는 청군의 후미를 친다. 하지만 영웅의 말로는 비극적이다. 김자점과 서인일파에 의해 제거당하는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지 못했다. 권 교수는 “치료가 마무리되지 못한 단계의 의식을 반영했다”고 했다.

 

허구적으로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싶은 민중적 요구가 반영된 작품은 <박씨전>이다. 실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부재함에 따라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이 박씨다. 이 허구적 영웅은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다. 그런데 왜 여자일까? 권 교수는 “다시 처음 <강도몽유록>으로 되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발화단계에 그친 원귀들이 다시 살아나 <박씨전>을 통해 침략군을 물리쳤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병란 트라우마’라는 서사코드가 세 작품에서 연계돼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크리스테바(Julia Cristeva)를 빌리자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권 교수는 영화 <최강병기 활>의 서사원형을 고소설에서 찾고 있다. 주인공이 영웅적인 모습으로 싸우는 것부터 ‘병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무의식적 발현일 수 있다. 신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 남이의 활솜씨는 한민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건국신화와 밀접하다. 대단원에서 호랑이가 청군을 물리치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도 이 동물을 신성시한 우리 고유의 신화적 요소다.

 

그런데 <최강병기 활>은 <박씨전>처럼 완벽한 승리로 귀결되지 못했다. 영화에서 남이는 누이를 구하고 청군을 소탕한 뒤 압록강을 거슬러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 중반부의 복선을 주목해 보자.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는 조선인은 조선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도록 운명 지어졌다. 영화는 ‘열린 결말’의 형태로 비극을 암시하고 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결국 <박씨전>처럼 치유에 성공하지 못하는 서사구조다. 권 교수는 “문학치료적 관점에서 남이는 임경업보다 월등하지만 박씨와는 비등한 신화적 능력을 가진 영웅”이라며 <최강병기 활>을 <임경업전>과 <박씨전> 사이에 자리매김했다.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등 古소설 서사원형과 상관성 규명

왕따 등 사회병리현상도 분석해 문학치료 연계 ‘독창성’ 인정

 

왜 영화는 19세기에 끝난 조선의 ‘병란 트라우마’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끄집어냈을까? 권 교수는 “우리 시대의 ‘병란 트라우마’는 동북공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화는 동북공정의 트라우마를 우회적으로 치유하려는 의식이 발현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동남아시아에서 한류 드라마가 ‘킬러 콘텐츠(killer contents)'가 됐을까? 권 교수는 지난 9월 25~26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린 제6회 세계한국학대회에서 <동남아시아 한류드라마의 한국고전서사 재생산과 한-동남아 서사코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독창성은 이른바 한류 드라마들이 한국 고전서사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나아가 한국과 동남아가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서사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즉 동일한 ‘서사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규명했다.

 

권 교수는 “한국드라마가 모두 한류드라마는 아니지만 아주 많은 한류드라마가 한국고전서사와 상관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례를 들었다. 드라마 <주몽>, <대장금>, <태왕사신기> 등은 영웅일대기,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은 전기소설, <유리구두>, <이브의 모든 것>, <천국의 계단> 등에서는 <콩쥐팥쥐전>과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권 교수에 따르면, 중세시대 우리나라와 중국, 동남아는 똑같은 전기소설(傳奇小說, 비현실적인 세상에서 전개되는 기이한 사건을 다룬 소설)이나 재자가인소설(才子佳人小說, 똑똑하고 아름다운 남녀가 만나 사랑하는 내용의 소설), 영웅이야기 등을 공유했다. 가령 <김운교전>은 17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그대로 번역이 됐고, 베트남에서는 <취교전(翠翹傳, 김반키에우)>으로 번안돼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자기 나라 작품처럼 인식되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춘향전>은 20세기 초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불어로 번역(Printemps Parfumé)이 됐는데,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전해졌다. 베트남인들은 <춘향낭자(낭 쑤언 후엉)>를 누구나 교과서에 실린 요약본을 읽었고, 자기나라의 민담으로 알고 있다.

 

권 교수는 “베트남 사람들도 중세시대부터 재자가인소설 등의 서사구조에 익숙했고 오랜 기간 이런 유형의 서사구조를 향유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베트남 드라마는 대개 신이 인간을 징벌하거나 동물의 변신, 사회주의의 교조주의적 이야기 등이 주류”라며 “옛날이야기로만 즐겼던 서사코드를 담은 한국드라마가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했다.

 

세계 최초로 상영화 된 다중접속육성시뮬레이션게임 <바람의 나라>.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이 게임과 만화 <바람의 나라>(김 진)의 상관성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도 권 교수다. 게임은 캐릭터가 무휼(대무신왕)이란 점, 배경이 고구려라는 점, 무기나 옷 등의 아이템이 고구려 소재라는 점 외에는 이야기상으로 연계성을 찾을 수 없었다. 유저(user)들도 원작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권 교수는 “게임사적으로나 디지털문학사적으로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연구를 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고전문학에는 실재하지 않은 대무신왕의 이야기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신화적으로 규명했다. 주몽의 신화적 일대기와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한 것. 이를 통해 만화의 서사원형이 대무신왕신화이며, 게임이 만화를 관통하는 서사적 원형을 담고 있다는 것을 해석했다. 만화가 게임과 서사원형의 중간 단계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유저가 게임에 접속을 하면 아기단계의 캐릭터가 형성된다. 이어 단계별로 주어지는 미션과 퀘스트를 클리어 해나가게 된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무휼이 영웅 대무신왕으로 완성돼가는 게 <바람의 나라>의 게임서사다. 권 교수는 “영웅은 비범한 혈통을 갖고 비정상적으로 출생한다. 이로 인해 멸문지화, 유리걸식, 적대자와 대결하면서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런 과정을 극복해야만 입공(立功, 공을 세우다)을 통해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몬스터와 싸우는 미션은 동부여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동북아의 최강자로 만든 영웅일대기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했다.

 

대전 傳說 분석해 정체성 추출中 도시의 매력은 스토리가 있어야

청계천보다 목척교가 훨씬 예뻐 "이야기 없어 매력 못 느끼는 것"

 

 

권 교수의 연구는 집단적 사회병리현상을 문학치료와 연계한 첫 시도라는 점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기존의 문학치료 이론은 우울증이나 강박관념 등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제로써 설화 텍스트를 선정해 읽히고 소감을 말하게 한다. 문학텍스트를 약이나 주사처럼 사용하는 셈이다. 이는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이다.

 

개인에 갇힌 이론으로는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군 동북공정이나 독도, ‘도가니’나 왕따 등의 현상을 해명할 수 없다. 고소설사 자체가 문학치료사이고, 향유층의 자기치료사가 곧 문학사일 수 있다는 시각은 그래서 독창적이다. 이를 통해 영화 <최강병기 활>을 <임경업전>과 <박씨전> 사이에 위치시킬 수 있었고, 최근의 드라마나 게임을 문학사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대학에서 “스토리텔러, 문화기획가 등 미래문화인재를 키우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시행하는 콘텐츠융합형교육프로그램에 지방대학인 안동대가 선정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대전에는 KAIST CT(문화기술)대학원이 있지만 지역문화를 다루지 않고 인문학보다는 테크놀로지에 치우친 면이 있다”고 했다. 그는 “대전대가 철저히 지역화된 문화기술융합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실제 권 교수는 서울과 부산, 영남권과 호남권, 독도와 일본 대마도까지 지자체나 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전설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지역의 정체성을 추출해 내는 게 목적이다. 요즘은 대전‧충청권의 전설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분석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할 예정이다. 대학에서도 대전지역의 전설을 분석한 내용으로 강의도 한다.

 

그는 “한반도는 철저히 서울 중심이고 지방은 그 밑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전락했다”며 “지방의 매력적인 요소를 끄집어내려면 스토리 중심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전의 목척교가 서울의 청계천보다 훨씬 예쁘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없다”고 했다. 그는 “하드웨어는 예쁜데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라며 “세상을 흥미롭게 인식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 즉 스토리로 대전을 팔 수 있다”고도 했다.

 


어릴 때 백과사전 외워 중학교 때부터 교수가 꿈

 

권도경 교수는 1974년 9월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 금정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에서 고전소설을 전공해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나이가 만 26세였다. 2011년 3월 대전대 교양학부대학 전임강사로 부임해 올해 7월 조교수로 승진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해외한국학연구소 자문위원, 한국문학치료학회 이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과서검정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공부를 잘 하게 된 비결을 물었더니 “어릴 적 남동생과 계몽사에서 나온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게임을 했다”고 대답했다. 몇 쪽에 있는 단어를 얘기하면 그 내용을 말하는 놀이였다. 그러고는 학교에 갔더니 영어, 수학을 빼고는 배울게 없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집중했고 배운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융합이 됐다. 영어, 수학만 열심히 하면 성적이 잘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학교 때부터 꿈이 교수였다. 의지와 목표가 뚜렷하니 열정이 생겼고, 결국 꿈을 이루게 됐다”고 했다.

 

장학생으로 입학한 건 아니지만 대학 다닐 때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석‧박사 과정은 연구비를 받아 등록금을 한 번도 낸 적이 없었다. 장보고재단, 태평양학술문화재단, 김구재단 및 김구아카데미,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IPUS), 솔벗학술재단, 남명학연구원, 대구경북발전연구원, 인천학연구소,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 수십 개의 대기업 산하 학술재단과 학술연구기관, 지자체 등이 그의 연구에 투자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프로젝트를 책임급 연구원으로 수행했고, 학술연구교수지원사업에 3년 연속 선정됐다. 공학이 아닌 인문학에서 이 정도의 펀딩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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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힐링'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조웅래 선양 회장.

 

어두침침한 실내조명. 벽에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고 응접실 한 구석에는 기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짧은 머리에 청바지, 흰색 와이셔츠 차림새의 사내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다. 흡사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했다.

 

조웅래(53). ‘에코힐링(Ecohealing)'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자연(ecology)과 치유(healing)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다. 요즘은 자연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 받는 ’에코힐링‘이란 말이 흔하게 쓰이지만 상업적으로 함부로 쓰면 법적 제재를 받는다. 조 회장이 지난 2007년 6월 상표로 등록해 놓은 상태다.

 

‘창업 영웅’이 지방소주회사 인수… 묘한 반전과 함께 지역사회 등장

 

 

건강과 휴식을 파는 그는 역설적이게도 술을 만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다. 한 때 ‘창업의 영웅’으로 불리던 그가 대전‧충남의 향토 소주 업체인 ㈜선양을 인수한 건 지난 2004년. 대기업에 밀려 텃밭을 다 내줄 위기에 처해 있던 지방의 소주회사 인수자가 벤처사업가라는 사실만으로 충격적이었다. 가치관의 혼돈이랄까 묘한 반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인 ㈜5425는 물론 가족을 모두 데리고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리고는 충청도 사람이 됐다. 5425에 근무하던 직원들도 덩달아 대전시민이 됐다. 뭔가 일을 꾸며도 단단히 꾸밀 사람으로 느껴졌다. ‘산소 넣은 소주’라는 기가 막힌 생각을 실천에 옮기더니 2년 후에는 자갈이 섞인 산길에 황토를 깔았다. 예상은 했지만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맨발로 뛰는 마사이마라톤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2010년부터는 맨발축제로 개념을 확장했다. 해발 423m의 평범한 계족산이 그의 아이디어 하나로 대전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다.

 

지난해 5월 15일 한국관광공사 이참 사장이 계족산을 찾았다. 그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차가운 진흙을 밟으니 자연의 에너지가 그대로 흡수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한 사람들과 정이 드니 기분이 좋아져서 절로 흥이 난다”고 했다. 그는 이를 “한국만의 매력인 기(氣), 흥(興), 정(情)의 에너지”라고 정의했다. 한국의 정취를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사장이 다녀간 후 계족산 맨발축제는 세계에 알려졌다. 관광공사가 4개 국어로 제작해 15개국 27개 해외지사에 비치한 홍보책자에 대한민국 대표축제 중 하나로 소개된 것. 이 책자는 국내 MICE산업(회의‧포상관광‧컨벤션‧전시회) 육성을 위해 제작됐다. 내세울만한 천혜의 자연환경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시작된 축제가 맨발축제다. 세상에 이런 축제가 또 있을까? 축제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대전에 있어선 더욱 그렇다.

 

이런 족적 때문인지 조웅래하면 ‘역발상(逆發想)’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거울에 사물이 역으로 비치듯 거꾸로 생각해 보는 걸 역발상이라고 한다. 역발상은 원래 사전에 없던 말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뒤집어 봤더니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정도가 될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창조(創造)로 이어진다. 그는 뒤집어 생각해보고 새로운 일을 꾸미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역(逆)으로부터 창(創)하는 게 그의 인생살이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역(逆)과 창(創)은 대중을 즐겁게(樂) 한다. 그래서 조웅래 식 경영은 역(逆)‧창(創)‧락(樂)으로 귀결된다.

 

뒤집어 생각하니(逆) 새로운 일이 비롯되고(創) 이로써 대중을 즐겁게(樂) 하리라

 

 

그는 1959년 경남 함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었던 데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대학진학은 꿈도 안 꿨다. 농사짓고 꼴을 베 소에게 먹이는 건 기본이었다.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러 리어카를 끌고 다녔고, 인분을 퍼 보리 짚과 섞어 퇴비도 만들었다. 그는 “공부를 못한다느니 잘하라느니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속을 받은 일이 없고, 좌충우돌로 살았던 게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고 했다.

 

머리가 좋은 편이었는지 대충하는 공부였지만 명문 마산고에 합격했다. 술 마시고 담배 피고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경북대 전자공학과에도 붙었다. 그는 “공부를 안 한 거지 못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78학번이니 시위가 끊이지 않을 때였다. 데모에 참여했다가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맞았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핑계로 자원입대했다. 백골부대에 배치됐는데 전공 덕분에 전화선을 설치하고 수리하는 가설병(架設兵)의 소임이 맡겨졌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삼성반도체와 LG정보통신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끝날지도 모를 그의 인생을 바꾼 건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이었다. 전화기가 다이얼식에서 버튼 식으로 바뀌었을 때였는데 마침 한국통신에서 유선망을 개방해줬다. ‘아이템만 있으면 망하지는 않겠다!’

 

당장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부속품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1992년 자본금 2천만 원으로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요즘말로 하면 ‘1인 창조기업’이다. 유선전화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사무실을 마련할 돈이 없어 아이의 침대 밑에 장비를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방에서 사람을 기다리다 100원을 넣고 띠 운세를 봤다. ‘전화로 운세를 볼 수 있다면…’.

 

그는 ‘8484(팔자팔자)’라는 번호에, 선풍적 인기를 끌던 중국 드라마 포청천,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의 남‧여 성우를 캐스팅했다. 배경으로 피리, 단소 소리를 넣어 점집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창업 1년 만에 1억 원을 벌었다. 대박이었다. 그 후 ARS 보드도 직접 만들었다. 국산 1호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술에 찌들어 살았다. ‘이러다간 폐인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음악 메시지 사업을 시작했다. 무선호출기, 이른바 ‘삐삐’가 보급돼 있던 시절이다. 삐삐 사서함에 음악을 저장해 놓으면 목소리와 멜로디가 함께 나오는 아이템이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도, 이메일도 없던 때였다. 크리스마스카드 대신 ‘700-5425’를 통해 캐럴송을 선물하는 광고를 했다. ‘사람과 사람사이’이라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음악으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한다는 의미였다. 상대방에게 음악으로 나를 표현하는 새로운 문화의 등장에 대중은 환호했다.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5425’는 국내 최대의 모바일콘텐츠 업체가 됐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기도 전에 ‘컬러링’의 개념을 개발한 게 그 원동력이다. 공격적인 ‘브랜드 마케팅’은 업계 난립으로 이른바 ‘700업체’가 하나 둘 쓰러지는 와중에서도 5425를 지탱시켜 줬다. IMF 외환위기 이후 연매출의 1.5배가 넘는 자금을 광고비로 쏟아 부었을 정도. 이 때문에 30~40대라면 누구나 ‘5425’를 기억하고 있다.

 

잘 나가는 IT기업이 많고 많은 제조업체 중 왜 주류회사를, 그것도 경영난에 허덕이던 지방소주회사를 합병했을까? 그는 2000년대 초반 무선인터넷 사업에 진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무선망 개방이 이뤄지지 않았다. 제조업으로 눈을 돌린 직접적인 이유다.

 

그는 “5425는 불특정 대중이 타깃이다. 소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걸 팔아봤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회사가 넘어갈 정도로 어려웠으니 역으로 생각하면 성장가능성이 많은 것 아니냐”고도 했다.

 

“산소 마시면 술 빨리 깨”… 하이힐 신은 女親 신발 벗어주고 맨발예찬가 돼

 

 

                              짧은 머리에 청바지, 흰색 남방 차림새가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했다.

 

그는 선양을 인수하자마자 산소소주를 개발했다. 당시 선양의 대표 브랜드는 은(銀)처리여과공법으로 만든 ‘새찬'이었다. 그가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포항심층수를 마셨더니 술이 빨리 깨더란다. 알아봤더니 산소가 30피피엠(ppm) 들어가 있었다. 그는 “산이나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면 덜 취하고 빨리 깬다. 산소를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 했다. ‘소주에 산소를 넣자’는 발상이었다.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일본에 특허를 낸 산소소주 ‘오투린(O2린)’은 그렇게 태어났다.

 

소주회사 선양이 에코힐링 기업으로 거듭난 사연도 재밌다. 그가 대전으로 이사 오고 대구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간혹 놀러왔다. 그 때마다 그는 도시락을 싸서 계족산 트래킹을 즐겼다. 2006년 4월 고교시절 자취할 때 친하게 지내던 여자친구 2명이 조 회장을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계족산에 갔는데, 하필이면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동행했던 남자친구와 운동화를 벗어주고 맨발로 걸었다.

 

자갈이 섞인 산길을 5시간이나 걸었더니 발이 성할 리 없었다. 그런데 몸 전체가 후끈거리고 잠도 푹 잤다. 이런 상태가 2~3일 동안 계속됐다. 조 회장은 널리 알려진 마라톤 마니아다. 42.195㎞ 풀코스를 40차례나 완주했다. 최근 기록은 경주벚꽃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30분 16초. 맨발의 효험을 알게 된 그는 이때부터 맨발로 뛰었다. 신발 신고 뛸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이런 걸 나 혼자 할 순 없지!’

 

지금은 조 회장 덕분에 맨발걷기가 유행처럼 됐지만 6년 전만 해도 정신 나갔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었다. 맨발로 걷기를 거리끼는 보다 근본적 이유는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이 문제만 해소하면 된다!’ 처음엔 마사토를 깔았다. 맨발걷기는 신발을 벗고 대지의 느낌을 받는 촉각이 중요하다. 거칠었다. 여기저기에서 황토를 공수해왔다. 느낌이 보드라우면서 편했다. 불그스름한 색깔은 따뜻하면서도 활기찬 기분이 들게 했다. 조 회장은 “이게 치유의 개념”이라고 했다.

 

그는 “마사이족은 육식을 주로 하는데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일반인의 3분의 1 수준이다. 하루에 20㎞ 정도를 걷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미지를 차용해 마사이마라톤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황토가 깔린 14.5㎞ 구간을 시간제한 없이 걷고 뛰었다. 숲길 사이사이에서는 연주가 이뤄졌다. 그동안 선양이 매년 전국에서 구해온 황토 2만여 톤을 쏟아 붓고 보수와 정비를 하면서 들어간 돈은 40억 원이나 된다.

 

천혜의 자연환경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대전 대표축제 만들어

 

 

                               조 회장은 널리 알려진 마라톤 마니아다. 42.195㎞ 풀코스를 무려 40차례나 완주했다.

 

대중이 즐거워하자 마사이마라톤은 맨발축제로 확대됐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 37개국 1000여 명의 외국인을 비롯해 1만 2000여 명이 다녀갔다. 참가비는 저소득 가정 및 다문화 가정 후원금으로 쓰인다. 10~20대는 참가비를 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4월부터 10월까지 주말마다 맨발 도장 찍기, 황토머드팩 체험 등 상시이벤트가 열린다.

 

2007년부터 월 1회 무료로 개최했던 숲속음악회는 올해부터 매주 토‧일요일 오후 4시 정기 상설무대로 운영된다. 선양 에코페라공연단의 ‘뻔뻔(fun fun)한 클래식’. 클래식과 뮤지컬, 연극, 개그가 한데 어우러져 3대가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지향하고 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좌우명이다. 그는 “제대로 미치려면 확신이 중요하다. 흥미가 있어야 미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사업하는 21년간 아침이 기다려질 때가 가장 좋았고 지금도 그렇다. 뭔가 설레고 할 게 많아야 아침이 기다려진다. 뭔가 미쳐있어야 할 게 많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맨발에 미쳐 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30분 택시를 타고 계족산에 간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고 걷는다. 그는 대중에게 함께 미치자고 한다. 그래서 황톳길 확산에 나서고 있다. 2009년 충남 아산 신정호를 시작으로 대전 둔산동 크로바아파트 단지, 대덕연구단지 한국연구재단, 천안 부엉공원 및 아산 용곡공원, 대전 갈마동 경성큰마을아파트 단지 등 도심 속에 황톳길을 조성했다.

 

그는 4년 연구개발 끝에 ‘맥키스(MACKISS)'라는 화이트 위스키를 출시했다. 도수가 40도가 아닌 21도다. '이지(easy) 칵테일’을 지향했다. “주스 같은 음료와 섞어 마시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주폭(酒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그의 발상에서 나온 술이다. 2009년 지경부가 대한민국 차세대 브랜드로 선정했고, 2012대전세계조리사대회 공식만찬 건배주로 사용됐다.

Posted by Paul Félix

리더십이란 무엇일까? 크게는 국가, 작게는 가정을 경영하는 데도 리더십이란 말을 쓴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지도력이나 통솔력 쯤 될 것이다. 리더는 조직이 향하는 목표를 제시하고, 구성원들은 왜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지를 수긍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통의 리더십이란 말이 나오고, 구성원들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영향력도 발휘해야 한다. <디트뉴스>는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 우리시대의 리더십을 발굴해 보고자 한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의 유형은 어떤 것일까?<편집자 주>

 

 

그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다.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할 줄 안다. 상대와 통(通)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법이 없다. 그래서 통(桶)이 크다는 소리를 듣느다. 통(通)하기 위해 통(桶) 크게 경영하는 게 정상철식 리더십이다.

 

총장선거 한 편의 반전드라마

 

2011년 11월 15일, 충남대학교는 제17대 총장선거를 치렀다. 모두 7명의 교수가 입후보한 가운데 치러진 선거에서 그는 한 편의 반전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는 1차 투표에서 3위에 턱걸이해 2차 투표에 진출했다. 그만큼 ‘진성’ 지지자가 적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2차 투표에서 2위로 올라선 뒤 마지막 3차 투표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결선 상대는 지난 16대 선거에서 2위를 차지했던 막강한 후보였다.

 

그렇게 충청권 거점국립대학의 ‘마지막’ 직선제 총장이 탄생했다. 정상철(58). 사람들은 그를 ‘소수파’ 총장이라고 불렀다.

 

2012년 6월 14일, 충남대는 사흘간 총장직선제 개선을 위한 학칙 개정 찬반투표를 벌였다. 그런데 투표 첫 날 교수회가 투표 거부를 선언했다. 교수회가 투표 거부라는 강수를 둔 데는 직원참여율이 최대 쟁점이 됐기 때문. 직원들은 총장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학칙개정을 묻는 투표인만큼 직원도 1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반면, 교수회는 종전 총장 선거 때처럼 전체 구성원의 12% 선에서 결정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교수가 자기 대학 총장도 못 뽑느냐’는 자괴감이 컸다. ‘민주화의 후퇴’이고 ‘권위주의로의 회귀’라는 정부를 향한 교수사회의 비판도 거셌다.

 

이런 논란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게 됐다. 14일 오후 6시 투표를 마감했더니 867명의 교수 중 707명이 참여해 81.6%의 투표율을 보인 것. 직원들은 357명 중 4명만이 기권해 98.9%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전체 투표율 86.6%. 찬성율도 교수 77%, 직원 96%에 달했다. 전체 찬성률 83.4%. 압도적인 표차였다.

 

2012년 3월 30일, 정 총장은 교육과학기술부와 ‘대학교육 선진화 방안 추진’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소수파’ 총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정부는 대학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각종 국비지원의 불이익을 주겠다며 직선제 폐지를 대학들에 압박하고 있었다. 정 총장은 총장 후보 시절 직선제 폐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총장에 취임하자마자 말을 바꾼 셈이 됐다. MOU에 따라 충남대는 8월까지 학칙개정을 통해 총장직선제를 개선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그는 구성원들에게 곧 사과했다.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총장 직선제 폐지는 피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임을 호소했다. “구성원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투표를 통해 학칙개정 여부를 결정하겠다”고도 했다. 사실상 구성원이 반대하면 학칙개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정 총장은 '소수파' 총장이다. 전국 국공립대학 휩쓴 총장직선제 폐지 이슈를 정공법으로 돌파함으로써 '소수파'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후 정 총장은 교수회, 총학생회, 재직동문회, 직원협의회, 총동창회, 학과장 간담회, 단과대학 순회간담회, 기관방문 간담회 등을 진행했다. 그는 “학생들의 권익을 보호하자. 교수는 참을 수 있지만 학생들은 졸업하면 끝”이라고 호소했다. 교과부의 대학선진화방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장학금, 취업지원, 국제교류 등 각종 국비지원 사업에서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역량강화사업 탈락은 대학에 있어 IMF급 손실이다. 가령 40억 원의 국비만 지원받지 못해도 신입생 1000여 명(25.4%)의 1년 치 등록금을 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총동창회, 의대동창회, 의대학부모회, 농과대 교수, 총학생회, 대학원총학생회 등 10여개 그룹의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묘한 소문이 퍼졌다. 정 총장이 학칙개정을 거쳐 연임을 시도하려 한다는 게 골자였다. 지난 3월 22일 열린 학무회의에서 먼저 말문을 연 건 정 총장 자신이었다. 진정성에 의심을 받으면 투표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취임식에서 이미 연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인쇄물로 배포가 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러자 대학이 법인화되면 초대 이사장을 맡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는 “지금 학무회의 발언이 녹음되고 있느냐”고 직원에게 확인한 뒤 “이사장도 안 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나서야 대학의 최종 의사결정기구인 학무회의에서 학칙개정을 의결했다.

 

 

교수회는 총장직선제 폐지를 골자로 한 학칙개정 찬반투표를 보이콧했지만 교수사회는 정 총장의 손을 들어줬다. 정 총장식 리더십의 승리였다.

 

총장직선제 폐지 이슈 정공법으로 돌파… '소수파' 한계 넘어

 

정 총장은 교수회의 요구대로 직접 비밀투표를 수용했다. 도박이었다. 이 한 판 승부에 대학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일부 대학이 투표결과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온라인투표나 투표 자체를 치르지 않고 학무회의를 통해 학칙개정에 나서는 ‘꼼수’를 부렸지만 그는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투표를 앞둔 지난 6월 5일, 그는 전체 교직원에게 이메일 서신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학칙개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입을 수 있는 행·재정적 불이익에 따른 대학의 위기상황을 이해시켰다. 구조개혁중점추진대학에 지정되면 결국 타율적인 총장직선제 폐지와 단과대 및 학과 통·폐합, 입학정원 감축, 재정지원 제한, 교육역량강화사업 지원금 회수, 교수 증원 배제, 각종 국책사업 탈락 등에 직면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대학발전의 비전도 함께 제시했다.

 

교수사회는 결국 정 총장의 손을 들어줬다. ‘대학의 자율성 훼손’ 등을 비판하면서도 대학의 위기와 제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피해를 더 걱정했다. 그는 “교수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건 놀라운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구성원들에게 총장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정말 대학에 위기가 온다는 정보를 진솔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진정성을 믿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충남대는 학칙개정을 위해 거점국립대학 중 처음으로 직접 비밀투표를 치렀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의사결정의 선례를 남겼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안다. 상대와 통(通)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는 ‘통(桶)이 크다’는 소리를 듣는다. ‘통(通)하기 위해 통(桶) 크게 경영하는’ 게 정상철 리더십의 요체다.

 

그의 리더십은 위기상황에서 더욱 빛난다. 2007년 당시 총장이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사퇴했다. 그는 기획처장이면서 공동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유치위원장이었다. ‘국립대라고 로스쿨을 모두 승인하면 사립대의 반발을 산다. 본보기로 하나 정도는 탈락시켜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충남대를 겨냥한 얘기였다. 그는 충남대가 로스쿨을 유치해야 하는 당위성보다는 지역사회의 용서를 구하는 데 주력했다. 분위기가 반전됐고, 충남대는 100명 정원의 대형 로스쿨을 지정받았다.

 

‘통(通)·통(桶) 리더십’의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생명공학관이 준공 후 2년이나 텅 비어 있었다. 서로 입주하려는 구성원 간 경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획처장이던 정 총장은 특별위원회를 구성, 교과부 기준을 참조해 교수1인당 면적 등을 산출했다. 그렇게 공간배정에 관한 원칙이 세워졌다. 이어 입주설명회를 열었고, 각 공간을 사용하려는 기관별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도록 했다. 기준이 세워지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 국립대학 최초로 무분규 등록금 협상을 타결한 것도 ‘통 크게 통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정 총장은 군기 센 의장대에서 투지를 배웠고, 청년시절 10여 개 직업을 오가며 통섭의 이치를 깨달았다.

 

군기 센 의장대서 투지 배우고 10개 직업 넘나들며 ‘통섭’의 이치 터득

 

그는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형제가 많다보니 그는 부모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장남은 크게 기대하고, 늦둥이는 귀염을 받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래서 소년은 늘 부모의 관심 밖에 있었다. 공부를 잘 해도 칭찬 한 번 듣지 못했고, 공부를 안 한다고 꾸지람을 듣지도 않았다. 형제들을 질투도 했지만, 곧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참고 인내하는 것을 배웠다.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지만 군대가 그를 바꿔 놨다.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 71학번이다. 소위 ‘의식적인’ 청년들이 모이는 학과다. 그는 기꺼이 학생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다 분신사건을 목격했다.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도피하고 싶었다. 2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했다. 호적이 1년 늦은 데다 취학도 1년 빨랐던 터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의장대는 군기가 셌다. 점호가 끝나면 잠이 오질 않았다. 집합을 해서 기합 받고 한바탕 매질을 당하고서야 곤히 잠들 수 있었다. 싸움질도 배웠다. 그렇게 34개월을 거칠게 복무했다. 복학을 하고나니 비로소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번도 돈을 벌어야겠다, 출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던 그였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결혼을 했다. 고교 3학년 때 교회에서 만난 2학년 여고생이었다.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생겼다. 그 때부터 도전이 시작됐다. 군에서 투지를 배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그는 충남대 전임강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4년간 10개의 일자리를 거쳤다.

 

처음에는 대기업에서 기계류를 수입하는 업무를 봤다. 로비하는 일도 했는데, 대외협상력과 조정력이 요구됐다. 명절이면 선물을 돌려야 했다. 낯 뜨거운 짓을 못하는 성미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술도 많이 마셔야 했다. 9개월을 일하고서 계획도 없이 사표부터 냈다.

 

‘화이트컬러’는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다. ‘블루컬러’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사회학과 출신이 일할 데가 없었다. 컴퓨터라는 기기가 처음 도입될 시점이었는데, 서울대 농대, 연세대 화학과, 성균관대 수학과 등을 졸업한 사람이 주로 이 일을 했다. 학원에서 7개월 과정의 컴퓨터프로그래밍 언어를 2개월 만에 속성으로 끝냈다. 중소기업 규모인 미국계 컴퓨터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이 회사에서 시스템엔지니어로 2년 반을 일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퇴근 후에는 장사를 했다. 평화시장에 가서 보세신발을 새끼줄에 묶어 시내버스를 타고 합정동 상가아파트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리포트를 쓰고는 낮 동안 장사를 하던 아내와 교대로 물건을 팔았다. 학원에서 전산실장도 했고, 동시에 대학에서 시간강의도 했다.

 

그는 여러 직업을 넘나들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배웠다. 인문계 출신이지만 이공계열 교수와도 말을 섞을 줄 안다. 학부에서는 비판적 성격이 강한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서는 실용학문인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교적으로도 자유롭다. 이선희 여사를 교회에서 만났지만, 아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바람에 결혼식은 성당에서 했다. 어머니 덕분에 절도 자주 다녔다. 그의 모친은 직접 절을 짓기까지 했다. 그의 말투는 투박하다. 그런데도 얘기를 주고받다보면 감정이입이 된다. 그는 “대화를 하면서 상대의 느낌을 공유하는 편”이라고 했다.

 

충남대 정보통신원장과 정보화기획단장을 지내면서는 시스템엔지니어로 일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cnu.ac.kr'이란 도메인 네임을 확보한 것도 그다. 이전에는 ’CNU‘란 이니셜을 충북대, 전남대 등 전국 5개 국립대학이 공동으로 썼다. 전국 최초로 충남대가 경상대학 전산실을 설립한 것도, 최저 예산으로 통합정보시스템을 구축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정 총장은 'CNU 선·후배 1대1 장학멘토링 모금 운동’을 주창하면서 자신의 지난해 연봉 전체를 먼저 기부했다. 취임 6개월만에 멘토링 장학금 15억, 발전기금 70억원을 돌파했다.

 

연봉 기부 '솔선수범'… 취임 6개월만에 발전기금 70억 돌파

 

정 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발전기금 1000억 원을 모금하겠다고 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비아냥거렸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달성 가능한 걸 목표로 삼으면 이미 목표가 아니다. 달성이 어려운 목표를 잡아야 그걸 향해 뛰어갈 수 있지 않겠나.” 그는 이 목표를 위해 ‘CNU 선·후배 1대1 장학멘토링 모금 운동’을 주창했다.

 

첫 테이프를 끊은 이가 그다. 그는 지난해 연봉 8032만 2490원을 대학 측에 기탁했다. 그가 솔선수범하자 교내외에서 기부가 잇따르고 있다. 총장 취임 후 6개월 간 장학멘토링 기금만 400건 15억 원이 모아졌다. 전체 발전기금도 70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그는 “1대 1일 장학멘토링 운동은 단순히 장학기금을 많이 모으자는 게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직문화를 바꾼다는 데 의미가 더 크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10년만 이어지면 끈끈한 형태의 조직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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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리더십을 떠올린 이유?

 

 

                      김형태 한남대총장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필자는 <CEO리더십 분석>이란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첫 번째 대상으로 김형태(66) 한남대학교 총장을 떠올렸다. 왜 ‘김형태’였을까? 아마도 그건 그의 변함없는 원칙과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와 대면해 이런저런 얘기를 진지하게 나눴던 건 지난 2008년 1월 말께였다. 그는 제14대 총장에 선출된 직후의 당선자 신분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기독교대학으로서의 정체성과 ‘써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즉 섬김의 리더십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성경의 말씀까지 곁들여 설명했다. 사실 지방대학의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에서 뭔가 대학발전을 위한 역동적인 발상 같은 걸 내심 기대했던 터였다. 실망스러웠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입장에서는 고리타분하게까지 들렸다.

 

4년이 흐른 지난 1월, 그는 다시 한남대 총장에 선출됐다. 이 대학 최초의 동문 총장에서, 연임에 성공한 총장이란 영예까지 안았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한남대가 요즘 언론사에 제공하는 보도 자료를 더 유심히 봤다.

 

그러던 중 이 대학 홍보팀이 서울역과 대전역에 설치한 광고판을 교체했다는 글을 최근 ‘페이스 북’에 올렸다. ‘청소부 아줌마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 대학 환경미화원 김운심 씨와 김승현 총학생회장(광.전자물리학과 4학년)을 모델로 등장시켰다. 신선했다. 이 광고판이 김 총장의 ‘써번트 리더십’을 필자에게 다시 상기시켜줬다.

 

 

한남대가 서울역과 대전역에 설치한 광고판. 실제 이 학교 환경미화원과 총학생회장을 모델로 썼다. 종전 광고판은 배우 강성연과 권상우 등이 모델이었다.

 

한남대의 GCC(Green & Clean Campus) 운동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 김 총장 집무실 앞 액자에 이 운동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새마을운동 구호 같은 행동강령이 걸려있다. 거기에는 ‘창학정신을 실천하는 한남대학생의 생활실천 다짐’이란 제목이 붙여져 있다.

 

캠페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날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겠습니다. 2.만나면 서로 미소 지으며 인사하겠습니다. 3.무감독 시험으로 정직을 실천하겠습니다. 4.담배꽁초와 쓰레기 없는 청정 캠퍼스를 만들겠습니다. 5.버스 안에서 자리 양보로 공익을 실천하겠습니다. 6.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더불어 살겠습니다. 7.국제적인 문제 해결에 앞장서겠습니다.

 

실제 이 운동을 주도하는 건 이 대학 총학생회다. 김 총장은 점퍼 차림으로 아무 말 없이 담배꽁초를 줍거나 시험기간 도서관 자리경쟁을 위해 이른 새벽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아침거리를 나눠줄 뿐이다. 학생들에게 솔선수범하는 총장의 모습을 보여 주는 셈이다. 여름이면 교내 환경미화원들을 초청해 삼계탕을 대접하고, 명절 때면 선물세트를 돌린다. 그러자 여교수들은 미화원들에게 겨울철 양말을 선물했다. 학생회는 하루 동안 여행을 보내드리고 대신 캠퍼스 대청소에 나섰다.

 

‘국제 문제 해결에 앞장서자’는 다소 거창해 보이는 실천구호지만, 학생회는 작은 것부터 실천했다. 최근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참가학생들이 1㎞당 100원씩 기부해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퇴치 기금’으로 250만원을 유엔재단의 한국주재 대표에게 전달했다.

 

김 총장에게 있어 학생들이 국제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유엔재단은 미국 CNN방송의 창설자 테드 터너(Ted Turner) 회장의 주도로 설립됐다. 한국인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유엔재단의 활동에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반 총장의 조국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국제망신이 아니냐는 것. 그는 “우리나라는 대학생까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해야 언권(言權)이 서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캠페인에는 한남대를 비롯해 숭실대, 영남대, 대한약사회, 서울고검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이웃돕기도 연습해 봐야 하게 된다. 자선도 연습”이라며 “작은 성의로도 얼마든지 국제 문제에 동참할 수 있다”고 했다

 

◇김형태의 리더십의 요체?

 

 

        김 총장이 수요예배에서 한 학생의 발을 닦아주는 세족식을 갖고 있다. 세족식에는 이 대학 교수들이 모두 참여했다.

 

김 총장 리더십의 요체는 ‘백 투 더 베이직(Back to the basic)’, 즉 원형회복이다. “대학설립 때의 창학정신으로 돌아가는 게 대학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지향점이다. 그는 “100년이 지나도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게 한남대 총장으로서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했다.

 

그는 “불변성과 가변성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대학의 설립정신을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적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가변 요소를 거부하면 낙오자가 된다”고 했다. “에볼루션(Evolution, 진화)을 거부하면 결국 레볼루션(Revolution, 혁명)을 당한다”는 표현도 썼다. 그러면서 “정체성을 지켜 가면서 유사 이래 가장 어렵다는 대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전환점)을 남기고 떠나는 게 나의 마지막 미션(사명)”이라고 했다.

 

김 총장은 이런 얘기를 옷과 효(孝)의 가치 등에 빗대 설명했다. 그는 “옷을 입는 건 변할 수 없지만 나이와 계절에 따라 바꿔 입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효의 방법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그 정신은 계승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그는 4년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김 총장은 그러면서 “가치론적 목표와 실용적 목표를 같이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남대에 입학한 사람을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양성하는 게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론적 목표라면 한남대를 졸업한 사람을 모두 직장에 취직해 내보내는 건 실용적 목표”라고 했다.

 

김 총장은 이런 목표를 구성원들이 이해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리더십의 정체를 “선(善) 의지를 자극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필자는 곧 여기에 ‘휴머니즘 리더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리더십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베드로의 발 닦아주던 예수의 리더십이 바탕

 

 

                        학생들과 함께 사랑의 연탄나누기 행사를 하고 있는 김 총장

 

김형태 리더십의 바탕은 기독교적 섬김의 리더십, 즉 ‘써번트 리더십'이다.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던 예수의 리더십이고, 한남대의 창학이념에 기초한 리더십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7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다. 동생 넷이 목사일 정도로 교역자 집안이다. 그도 교회 장로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경 정신대로 살자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얘기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총장이 아닌 총종(總從)이라 부른다. 총장은 모든 구성원을 섬기는 자리라는 뜻이다. 학장은 학종이고, 처장은 처종이니 그는 머슴 중에 상머슴인 셈이다. 그는 “크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낮은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자를 섬겨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는 서울대 총장도 아니고 충남대 총장도 아니다. 대학 설립정신대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리더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 선교사들이 희생하며 대학을 설립한 건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국가를 섬기는 한국인을 양성하고자 한 것”이라며 “서울대에서 이렇게 하니 한남대도 똑같이 하자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총장으로서 설립정신을 일관되기 유지해야 하는 건 사명감”이라며 “변화의 시대인 건 분명하지만 원칙적인 방향은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소년 김형태만을 위한 14년간의 장학금

 

 

김 총장은 한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사진은 1976년 총장실 앞에서 촬영됐다. 그는 이 때부터 리더를 꿈꿨을 것이다.

 

김 총장의 리더십 형성에는 초등학교 은사들의 헌신적인 베풂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김 총장은 부지런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6년 간 단 하루도 학교를 빠진 적이 없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면서 학업우수상과 개근상을 받았다. 인정을 받아 뿌듯해진 소년은 무거운 책임감 같은 걸 느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누님 결혼식이 있었는데도 소년은 학교에 갔다. 청첩장이라도 선생님께 보여 주면 결석처리를 면할 만도 했을 텐데 말이다. 중학교는 25리(10㎞)를 매일같이 걸어 다녔다. 그래도 소년은 3년 개근을 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담임선생님의 지도아래 방과 후 1~2시간씩 보충수업이 이뤄졌다. 그런데 소년은 이 수업을 빠져야 했다. 수련장 살 돈마저 없었기 때문. 소년은 중학교 진학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이 소년의 집을 찾아왔다. 가정방문 다음 날, 선생님이 소년을 교무실로 불렀다. 공부도 잘 하는 아이가 중학교에 못 간다는 게 안타깝다며 선생님이 전형료를 선뜻 내줬다. 소년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논산 대건중에 입학했다. 입학성적은 전교 3등.

 

다행이 그 해부터 입학 10등까지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생겼다.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하지만 책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담임선생님의 주도로 소년만을 위한 장학회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김형태장학회’. 노성초등학교 교장을 비롯해 15명의 선생님 모두가 참여했다. 선생님들은 월급에서 600원씩을 뗐다. 소년은 그렇게 매달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의 휴머니즘 리더십은 베푸는 삶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ㄷ. 학생들이 환경미화원들을 여행 보내드리고 대신 교정 청소를 했다.

 

김형태장학회는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년이나 유지됐다. 장학회 창립 멤버인 선생님들은 매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그렇게 장학회를 이어갔다. 그동안 교장도 세 번이나 바뀌었다. 나중에는 소년을 직접 가르친 선생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장학회는 이미 그 학교의 전통이 돼 있었던 셈이다.

 

김 총장은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은장학기금’을 조성, 이 학교 졸업생을 3명씩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는 “과분한 도움을 받았다. 남의 은혜로 산 사람이니 반드시 갚자. 사람 하나 길렀더니 의미가 있구나 하는 보람은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은혜를 입고 사랑을 받으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생긴다”고도 했다.

 

◇ 정봉욱 장군에게서 '총장학'을 배우다

 

 

김 총장은 기독교대학의 설립정신을 토대로 학생들이 국제문제 해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프리카에 PC보내기, 아프리카 말라리아 퇴치 기금 조성 동참 등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다.

 

청년 김형태는 1970년 입대했다. 논산육군훈련소에서 사병으로 복무를 했다. 처음에는 지휘부 사역병으로 있었다. 6개월여가 지났을 때 정봉욱(89) 장군이 소장으로 부임해왔다. 정 소장은 인민군 대령 시절 전향했다. 삼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강의를 한 번 하면 8시간을 쉬지 않고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김 총장은 “총장학(總長學)을 별도로 배운 적이 없지만 군대에서, 정 장군님을 지켜보면서 리더십을 배웠다”고 했다.

 

정 장군은 훈련병들을 정신 교육시키면서, OHP 교육 자료를 활용했다. 정 장군이 한자로 초고를 쓰면 한자를 전공한 사병들이 옮겨 썼는데 재대로 읽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서체가 좋아 뽑혀온 김 일병이 70~80%를 술술 읽었다. “제대로 할 놈이 여기 있었네”라는 정 장군의 말 한 마디로 그의 보직이 훈련소장 비서병으로 바뀌었다. 청년은 엑스레이 촬영했던 폐 필름을 닦아서 장군의 초고를 정서했다. 그렇게 만든 자료가 전역할 때까지 무려 6300장.

 

정 장군은 신문기자를 하다 입대한 청년을 무척이나 아꼈다. 환후가 위중해진 청년의 부친은 정 장군의 배려로 훈련소 병원으로 옮겨졌다. 부친은 영관장교 치료받는 이 병원에서 1주일간 치료를 받다가 작고했다. 장례식은 본부중대 주관으로 치러졌고, 군악대가 진혼곡을 연주했다.

 

정 장군은 김 총장이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줬다. 김 총장은 “아흔이 가까운 연세인데도 모택동전집을 읽고 강의를 하실 정도”라고 했다. 청년에게 정 장군은 무엇보다 청렴한 지휘관이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윤군훈련소장 1년만 하면 빌딩 한 채를 산다고 할 시기였다. 이를 근절하기 위해 정 장군은 가톨릭대 다니다 온 사제준비생을 뽑아 분류과에 배치했다. 신앙심으로, 양심적으로 부대배치를 하라는 뜻에서다. 이도 못미더웠는지 직접 초안까지 작성했다.

 

 

                             2008년 고국을 방문한 반기문 총장 환영행사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잔반을 인근 주민들이 가져다가 돼지에게 먹이곤 했는데 일정한 양대로 새끼 돼지 한 마리씩을 받았다. 잔반과 금품을 교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받은 새끼 돼지를 취사장 근처에서 길러서 매달 합동 생일잔치를 열었다. 100원씩 내고 영화를 관람하던 연무관, PX(매점) 이익금은 계급별로 봉투에 넣어서 격려금으로 줬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부정하지 말라는 뜻에서다. 김 총장은 “부대 운영비로 소장이 써도 되는 돈까지 한 푼 쓴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또 “정 장군님은 위법에는 단호하고 비리에는 용서가 없었다”며 “대신 업무를 잘 몰라서 하는 잘못은 용서했다”고 했다. “당장은 혹독하게 부하를 대해 인기가 없었지만 그게 공동체를 살리는 길임을 알게 됐다. 당장 인기만 보면 그 공동체는 절단이 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아니라 훗날 역사에서 인정을 받겠다는 게 리더의 자세”라고 했다.

 

그는 “군 복무를 대학원 다닌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며 “군대는 국방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국민교육으로서의 기능도 한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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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안에 아타카마, 고비, 사하라, 남극 등 4대 사막마라톤을 완주, 한국인 최초의 명예의 전당 헌액에 도전하는 한남대 기독교학과 4학년(린튼글로벌컬리지 복수전공) 최규영 씨

 

아타카마, 고비, 사하라, 남극…. 지구상에 남아 있는 최고 극한의 환경이다. 영겁의 세월을 거쳐 이런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몸을 변화시켜 온 생명체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이다. 이 4대 사막에서 죽음의 레이스가 펼쳐진다. 레이싱 더 플래닛(Racing The Planet)이 개최하는 ‘오지 사막마라톤’이 바로 그 대회다.

 

각 레이스는 모두 250㎞의 코스로 이뤄져 있다. 6박 7일간 침낭, 헤드랜턴 등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28종의 장비만을 배낭에 메고 달려야 한다. 참가자격은 메디컬(medical) 서류를 통과한 만22세 이상이어야 한다. 음식은 일반 성인이 하루에 필요한 2000kcal씩 1만 4천kcal 이상을 휴대해야 한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내에 주어진 코스를 통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각 레이스마다 전 세계의 건각 150~160명이 참가하는 데 대개 20여명이 탈락한다.

 

세계 4대 사막에서 펼쳐지는 이 죽음의 레이스를 1년 이내에 모두 완주하면 ‘명예의 전당’ 에 헌액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1명만이 이 영예를 얻었다. 국내에서도 이 모든 코스를 완주한 7명이 있지만 1년 이내에 모두 정복한 사람은 아직 없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도전에 나선 20대 젊은이가 있다.

 

최규영(28) 씨. 대전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4학년 학생이다. 이 대학 린튼글로벌컬리지에서 컬쳐&커뮤니케이션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워킹 홀리데이로 참가비 마련… 아타카마·고비사막 500㎞ 완주

 

 

칠레 아타카마 사막레이스 장면

 

최 씨는 이 서바이벌 레이스에 도전하기 위해 해외 농장에서 일을 했다. 코스별 참가비가 3300달러(한화 약 380만 원)에 달하기 때문. 마지막 코스인 남극마라톤은 참가비가 1만 1500달러(한화 약 1350만 원)에 이른다.

 

최 씨는 지난해 8월 호주 퍼스(Perth)의 브로콜리 농장에 취업했다. 원래는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이 일하던 다국적 농장이었는데 지금은 한국인만 뽑아서 쓴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워낙 일을 독하게 해서 그렇다고. 허리를 구부린 채 매일 10~11시간을 일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브로콜리가 사람 무릎 높이까지밖에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보증금(deposit)으로 300달러를 내고 일을 시작하는 데 3개월 이내에 그만두면 이 돈을 받지 못한다. 일이 워낙 고되다보니 열에 여덟은 중도에 농장을 떠난다고 한다. 선임자가 도중에 허리를 펴지 못 하게 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 일쑤였다. 최 씨는 이 농장에서 4개월간 일했다. 근로소득세 등을 제하고 1만 4천 달러를 벌 수 있었다.

 

그는 올해 세계 4대 사막을 모두 정복하겠다는 각오로 오지레이스를 시작했다. 첫 번째 도전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소금과 탄산칼슘이 말라붙은 험준한 소금사막 250㎞를 6박 7일간 종단해야 하는 코스였다. 그는 “지형이 울퉁불퉁해서 발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달렸다”고 했다.

 

 

발에 붕대를 칭칭 감고 250㎞ 코스를 종주했다.

 

하루에 40㎞가량을 돌파해야 하는 데 매 10㎞ 지점마다 체크포인트가 있다. 그곳에서 시간도 체크하고 물도 보충 받을 수 있다. 물은 배낭에 넣어 호스를 연결해 마시면서 달렸다. 1일 코스의 마지막 지점에는 1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텐트가 설치돼 있어 잠을 해결할 수 있다. 사이버텐트도 있어 인터넷도 할 수 있고, 모닥불에 물을 끓여 컵라면 같은 따뜻한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의료 천막에서는 간단한 진단과 진료도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250㎞를 완주하면 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 사실 완주보다 더 큰 당장의 기쁨은 피자와 콜라. 최 씨는 “이거 먹으려고 마지막 말에는 허파가 나올 정도로 뛰었다”고 했다. 마지막 날에는 호텔에서 굿바이 파티를 열어주는 데 시상식과 함께 종주 장면을 담은 영상을 관람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이 마감된다.

 

아타카마에서 생존에 성공한 최 씨는 두 번째 레이스인 중국 카슈가르의 고비사막 종단에 도전했다. 역시 지난 6월 10일부터 16일까지 6박 7일의 일정이었다. 고비사막은 연강수량이 50㎜미만이고 돌과 자갈이 섞인 지형이다. 그는 “산이 많아 체력 소모가 다소 더 컸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는 오는 10월과 11월 이집트 사하라사막과 남극 레이스에 나설 예정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막과 가장 추운 얼음사막이다.

 

특히 남극은 칠레와 중국, 이집트 레이스를 모두 완주한 건각에게만 참가자격이 주어진다.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악천후에 크레바스(얼음틈새)라는 돌출 변수까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레이스이기 때문. 그는 “블리자드라는 강풍이 불어 닥치면 순식간에 영하 20~30도로 기온이 급락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사하라 레이스까지 마치면 남극 종주에도 자신감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 코스를 완주하고 받은 메달을 입으로 깨물고 있다.

 

◇그는 왜 도전에 목숨을 걸까?

 

최 씨에게 왜 위험한 도전에 집착하는지 물었다. 그는 “실패는 해도 절대 포기는 안 한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송촌고등학교 1학년 때 택견에 입문했다. 2학년 때는 ‘용인대학교총장기 전국 택견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그런데 택견으로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사부(師父)와 결별하는 아픔을 겼었다.

 

그는 체육계 명문인 용인대 입학을 원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은 대전권 대학에 입학시켜 계속 운동을 가르치고 싶어 했던 것. 2002학년도 입시 때는 하필 특채 전형도 없었다. 그는 스승과의 관계를 끊고 용인대에 응시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재수 끝에 한남대 기독교학과에 입학했다.

 

 

중국 고비사막 레이스 장면

 

사부와의 이별, 입시 실패 등은 그를 한층 강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그래서 군도 특전사에 하사로 입대해 중사로 마쳤다. 충북 증평의 13공수특전여단에서 4년 3개월 간 군복무를 했다. 특수작전 및 훈련을 60차례 이상 소화하고 밀리터리 강하도 40차례 이상이나 해냈다. 끈이나 칼 등 소리가 나지 않는 도구로 적을 살해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무성살상무기 교관이자 72대대 8중대 부팀장을 지냈다. 종합전술 여단장표창 등을 일곱 번이나 받았다.

 

택견을 포기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나약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건 온전히 군 복무 덕분이었다. 그는 “모든 훈련을 100% 다 참가했다”며 “열외하거나 뒤처지는 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군 생활을 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가 그와 누이를 키웠다. 어머니는 노점에서 양말을 팔고, 식당을 운영하며 그렇게 남매를 키웠다. 오누이는 어머니와 함께 우유도 배달했다. 불우한 청소년기와 특전사 군 복무를 거치며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키운 셈이다.

 

대학생활도 일반 학생보다 두 배는 열심히 했다. 복수전공도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실레스트 합창단, CC프레이즈(praise), 팀ET(Earth Traveler), 린튼글로벌컬리지 자전거동아리 등 동아리활동도 다양하게 참여했다. 특전사 부사관 복무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다지는 바탕이 됐다.

 

 

특전사 복무 시절 동료와 함께 촬영한 사진

 

NGO단체인 한국기아대책이 설립한 아프리카 우간다 쿠미대학교에는 최초의 한국인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갔다. 아프리카에서 500시간의 봉사활동에 참여해 <조선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

 

지난해 9월부터는 세계일주도 시작했다. 한 번 출국에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도는 게 아니라 한 나라씩 집중적으로 여행한다. 그렇게 15개국을 다녀왔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았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 계획이다.

 

최 씨는 “지금은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과정”이라며 “나이가 50~60세가 됐을 때 대학 강단에 서서 살아온 삶을 학생들에게 얘기해 주고 책도 출판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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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은행지점장, 내과의사, 대기업 연구원의 힘겨운 ‘脫둔산’ 르포

 

#1

 

 

서울에서 은행 지점장으로 은퇴한 김 모(63) 씨는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뒤 고향인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가 아내와 함께 보금자리로 마련한 집은 서구 둔산1동 목련아파트 138㎡(공용면적·구 42평) 기준층(11층). 지난 2006년 5월이었다. 매매가는 5억 5500만원. 이 아파트의 실거래가가 가장 높았을 때가 바로 이 해 4~6월이었다.

 

김 씨는 서울 아파트를 정리하고 남은 돈을 정기예금, 즉시연금보험 등 안정적인 금융상품에 투자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이자수익과 개인연금 등으로 부족하지 않은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다. 대전생활 6년째 접어든 그의 아내도 무척 만족해했다. 대전의 중심지답게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환경이었다. 문화시설, 병원, 관공서, 금융기관, 대형마트 등이 가까워 둔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올 설 연휴 때 서울에서 온 큰 아들 내외가 도안신도시나 세종시로 이사할 것을 권유했다. 아들이 내세운 논리는 둔산 아파트의 노후화와 그에 따른 이 지역 중상류층의 ‘탈(脫) 둔산’ 현상. 장기적으로는 세종시로 이사하는 것도 검토했지만 굳이 당장의 생활편의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김 씨 부부는 지난달 말 유성구 상대동 도안신도시 9블록 트리풀시티 127㎡(공용면적·구 38평) 아파트를 계약했다. 분양가 3억 4천만 원에 웃돈을 8천만 원(확장비용 포함)이나 줬다. 부부 내외가 생활하기에 충분히 넓은 면적인 데다 아들 딸 부부가 집에 들러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당장은 편의시설이 부족하지만 도안신도시가 둔산을 대체할 거주단지가 될 것이란 확신도 들었다.

 

그런 김 씨 부부가 난처해졌다. 막상 계약금까지 지불하고 이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집이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 김 씨의 아파트의 현 시세 상한가는 5억 2천만 원. 오히려 구매시점보다 3500만원이나 떨어졌다. 리모델링 비용을 합하면 5천만 원 이상이나 빠진 셈이다. 부동산 업소에서는 4억 9천만 원에 팔아주겠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김 씨는 “임대도 생각했지만 전월세 모두 수요자가 없는 실정”이라며 “노후자금을 건드리기는 곤란하고 구매자가 4억 8천만 원이면 적극 고려하겠다고 해 그렇게라도 매도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2

 

 

내과의사 한 모(55) 씨는 서구 둔산1동 크로바아파트에서 7년째 살고 있다. 그의 집은 공용면적 135㎡(구 41평) 기준층(7층). 지난 2006년 1월 5억 2500만원에 산 이 집의 현 시세는 5억 7000만원.

 

한 씨는 자녀 둘을 모두 서울의 대학에 진학시킨 뒤 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원했다. ‘도안신도시냐 세종시냐’를 두고 아내와 갑론을박을 벌인 뒤 최근 웃돈 4500만원을 주고 세종시 첫마을 2단계 아파트를 매입하기로 했다. 계약금까지 치렀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17층 아파트 전용면적 114㎡(구 45평)다.

 

자녀 교육 부담까지 덜었던 터라 더 긴 안목으로 세종시를 선택한 것. 발코니 확장비용, 취‧등록세를 포함하면 4억 5천만 원이 소요될 예정이다. 한 씨는 중장기적으로 둔산의 병원을 정리해 세종시에 병원을 마련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그런데 금강변을 따라 아내와 함께 산책하는 꿈을 꾸던 한 씨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대전의 아파트가 팔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 아파트 값도 시세대로 받을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아래층 아파트가 지난해 10월 5억 7천만 원에 팔린 이후 11월에는 9층 두 채가 각각 5억 6400만원과 5억 6천만 원에 매각됐다. 12월 말에는 옆 라인 같은 층 아파트가 5억 4000만원에 매매계약이 이뤄졌다.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채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게 인근 중개업소의 설명이다.

 

부동산포털 등을 보면 크로바아파트 135㎡형의 시세 상한가는 5억 7000만원으로 일제히 표시돼 있다. 한 씨 집의 경우 이른바 ‘로열층’인데다 발코니 확장까지 시공한 상태. 하지만 한 씨는 5억 4천만 원에도 집이 팔릴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형편.

 

한 씨는 “5억 4천만 원에 팔릴지도 미지수지만 설사 그 가격에 매매가 이뤄져도 인테리어 비용과 취‧등록세를 감안하면 손해를 봐야 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는 중개업소로부터 1천만 원은 더 내려 매각할 생각도 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3

 

대덕특구의 대기업 연구원인 이 모(52) 씨는 지난 2006년 1월 3억 7천만 원을 주고 목련아파트 122㎡(공용면적·구 37평) 7층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했다. 둘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할 시점이었다. 이 씨의 로드맵대로 아들은 탄방중, 충남고에 잇따라 진학했고, 바라던 서울의 대학에도 합격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부모의 도리를 다 했다고 판단한 이 씨는 더 이상 둔산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세종시를 선택했다. 직장과 거리상 멀지 않은 데다 교통망 확충도 예정돼 있어 이 씨에게는 최적의 입지였다.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의 미래가치에도 주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최근 매물로 나온 세종시 첫마을 2단계 삼성래미안 전용면적 101㎡(구 40평) 15층 아파트를 계약했다. 웃돈은 시세보다 1천만 원 낮은 5천만 원만 치르기로 했다. 매도자가 잔금 치를 여력이 없었던 터라 계약 당사자 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덕분이다. 총 매입가격은 3억 8500만원. 이씨는 합법적인 전매시점인 6월 말쯤 잔금을 치르고 이사를 할 계획이다. 금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도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여기 까지는 모든 게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원하는 가격에 집을 매도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의 아파트 시세 상한가는 4억 3500만원. 기준층인데다 리모델링까지 돼 있는 집이어서 부동산 업소에서는 4억 2500만원에 매매 협상을 추진 중이다. 그가 조바심을 내는 건 집을 보겠다는 수요 자체가 없기 때문. 들리는 얘기로는 지난해 12월 말 12층 아파트가 4억 원에 팔린 이후 현재까지 거래도 실종된 상태라는 것.

 

조금씩 매매 호가를 낮춰 잡아 요즘은 3억 9500만 원이면 매수자가 나타날 것 같단다. 이 씨는 “확장비용이나 취‧등록세를 고려하면 시세차익은커녕 손실이 불가피한 실정”이라며 “원하는 가격은 아니라도 매수자가 하루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둔산 A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노후화된 둔산 아파트 소유자들이 도안신도시와 세종시 등 신규 공급물량으로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매물이 쏟아지는 데 매수자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임대도 여의치 않으면서 자금에 여유가 있는 세대는 급매물로 매도하느니 차라리 집을 비워둔 채 이사를 하고 있다”고도 했다. 대전의 강남으로 불리던 둔산1동에 공실 아파트가 속출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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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신도시․세종시 매매시장 뒤흔들 이동물량… 학군수요마저 줄어 전입감소 추세

 

                            둔산불패의 상징처럼 여겨져온 대전 서구 둔산1동 크로바아파트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개포우성, 선경, 미도아파트를 흔히 강남의 ‘빅3’라고 부른다. 중대형 아파트의 집적 비율, 지하철 등 대중교통 접근성, 대규모 상권과의 인접성 등이 우수하다는 게 강점이다. 여기에 ‘강남불패’ 신화를 이끈 교육여건이 있다. 대치초와 대곡초, 대청중이 이들 단지 주변에 근접해 있고, 유명 학원들이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대전에서 대치동과 비슷한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 서구 둔산1동이다. 크로바, 목련 아파트로 대변되는 지역이다. 대전의 집값 상승을 주도하며 ‘둔산불패’라는 말을 낳았다. 한밭초, 탄방중, 충남고로 이어지는 ‘둔산 8학군’에 길 건너편 탄탄한 사교육 인프라까지 ‘둔산에 살면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교육여건이 둔산 집값을 떠받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던 것.

 

이런 둔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둔산이 노후화되면서 불패신화가 흔들리고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 둔산의 중상류층이 대거 도안신도시로 이동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여전히 ‘교육특구’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젊은 층의 유입은 감소하고 노장년층의 이탈은 급증하고 있다.

 

◇‘젊은’ 도안이 ‘늙은’ 둔산 대체

 

 

둔산의 노후화와 도안신도시 등 대체단지의 출현으로 둔산불패의 신화가 깨지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부동산114 대전충청지사에 따르면, 대전의 아파트 시세는 2010년 하반기부터 꾸준히 상승했다가 지난해 11월 말 처음으로 평균 -0.05% 하락했다. 17개월 만이다. 이후 올 4월말까지 평균 -0.42% 떨어졌다. 이 기간 둔산이 견인해 온 서구 아파트 값은 이보다 하락폭이 더 큰 -0.54%.

 

실제 둔산불패 신화의 주역인 목련, 크로바아파트는 올해 들어 거래가 실종된 상태. 부동산시장에서는 지난 2010년 상반기 수준에서 매물이 나오고 있지만 매수세는 자취를 감췄다.

 

둔산의 공인중개사무소들을 돌며 지난 2006년 1월부터 크로바 135㎡(41평)의 실거래가를 들여다봤다.

 

향이나 동별로 시세가 다를 수 있지만 7층 기준으로 5억 2500만원에 거래된 이후 이듬해 3월 5억 8500만원까지 치솟았다. 2009년 4월 4억 9600만원에서 같은 해 7월 5억 2500만원, 2010년 5월 5억 원에 각각 매매가 이뤄졌다. 대전 집값이 고공행진 중이던 2010년 10월 5억 5천만 원에 거래가 이뤄진 이후 계속 이 가격대(+500~1000만원)를 유지했다. 지난해 10월 6층 아파트 한 채가 5억 7천만 원에 팔린 게 최근 가장 높은 시세였다. 11월 9층 아파트 두 채가 각각 5억 6400만원과 5억 6천만 원에 거래됐다. 하지만 12월 7층 아파트가 5억 4천만 원에 팔린 후 거래가 자취를 감췄다.

 

목련아파트 138㎡(42평)도 엇비슷한 수치를 나타냈다.

 

2006년 11월 8층 아파트가 5억 7천만 원으로 최고점을 찍은 이후 이듬해 12월 4억 9500만원으로 떨어졌다. 2008년 5월 4억 9천만 원에서 2010년 2월 최저점인 4억 5천만까지 내려갔다. 2010년 11월 4억 9700만원으로 반등해서는 역시 이 가격대(+500~1000만원)에서 보합세를 보였다. 지난해 12월 6층과 12층 아파트가 각각 4억 5천만 원에 팔린 후 거래가 사라졌다.

 

지난 6년여 간의 실거래가 분석결과, 목련, 크로바 아파트는 이미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없는 단지로 전락해 있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젊은’ 도안이 ‘늙은’ 둔산을 대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대전도시공사와 지역 부동산업계는 도안 9블록 트리풀시티의 경우 30%가량이 둔산에서, 20% 정도가 노은에서 각각 입주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금성백조가 도안 7블록에 공급, 2014년 6월 입주예정인 ‘예미지’는 둔산 21%, 노은 15%가 계약한 것으로 조사됐다. 호반건설이 도안 2블록에 분양한 ‘베르디움’은 서구, 유성구 계약자가 전체957 세대의 70%에 이르렀다고 집계했다.

 

이밖에 3블록 한라비발디, 8블록 신안인스빌, 17-1블록 현대아이파크, 17-2블록 계룡리슈빌 등을 모두 합하면 둔산, 노은에서 빠져 나왔거나 빠져 나올 세대는 수천세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대전 아파트 매매시장을 흔들고도 남을 정도의 이동물량이다.

 

익명을 요구한 둔산 A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노후화된 데다 과밀개발로 재건축도 사실상 불가능한 둔산을 떠나 도안이나 세종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여기에 둔산에서 노은으로 갔다 다시 도안으로 향하는 추세”라고 했다. 그는 “둔산 지역 시세는 조정기를 거쳤다가 다시 반등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내림세가 예사롭지 않다”고도 했다.

 

◇“교육특구, 굳이 둔산이 아니어도…”

 

목련아파트 네거리는 대전 최고의 학원들이 밀집해 있다. 둔산불패를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던 셈. 하지만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면서 나름 유명세를 타는 학원들이 늘어났다. 굳이 둔산이 아니어도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

둔산이 누려온 ‘교육특구’로서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지만 ‘굳이 둔산이 아니라도 괜찮다’는 의식의 변화도 읽혀진다. 몇몇 수치만으로 교육과 부동산 가격 변화 사이의 상관관계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징후는 눈여겨 볼만하다는 얘기다.

 

대전서부교육지원청에 따르면 둔산지역 3개 중학교, 즉 탄방중, 문정중, 삼천중으로 전․입학한 학생 수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 지난 2010년 3월 1일부터 이듬해 2월말까지 대전지역 내에서 105명이 이들 3개교로 옮겨왔지만, 2011년 같은 기간에는 59명으로 줄었다. 집값을 받쳐 주던 학군수요가 그만큼 없어졌다는 소리다.

 

자립형사립고의 등장도 종전 둔산 지역 명문고와 특목고 등으로 나뉘었던 상위권 학생들의 진학에 영향을 미친 요인이다. 둔산에서 학교배정을 받지 않고 자사고를 선택하거나, 어느 지역에 살더라도 둔산 수준의 고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된 것.

 

 

지난 2011학년도부터 신입생을 선발한 서대전여고의 출신학교별 분포를 보면 탄방중 31명, 문정중 30명, 삼천중 24명 등으로 둔산 지역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성고도 마찬가지. 1~2학년의 출신지역별 현황에 따르면, 둔산동이 84명으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둔산 외 지역 중학생들의 진출도 뚜렷하다. 서대전여고는 글꽃중(문화동)이 27명으로 출신학교 중 세 번째로 많았고 신계중(복수동), 관평중(관평동), 노은중(노은동) 등 대규모 아파트단지 출신들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대성고도 송촌․법동, 유성구 노은․지족동, 중구 목동․태평동 등에서 진학한 학생이 많았다.

 

대성고 송당헌 교감은 “오는 6월 26일 국가학업성취도시험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대부분 상위 40% 이상의 학생이 입학하는 자사고의 등장이 권역별 학력 평준화에 기여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둔산의 A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전세 값은 신학기 이동수요와 봄 이사철 준비 수요가 오르면서 올라가는 경향이었는데 둔산은 예년에 비해 외부에서 유입되는 학군수요가 현저히 감소했다”며 “물량이 적체되면서 전세 값 하락세도 장기화될 전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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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1958년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에서 4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성적이고 모범적인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냈다. 그의 부모는 맏아들 교육에 관심이 컸다. 마침 외삼촌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터라 서울 외가로 보내졌다.

내성적인 소년, 교수 꿈을 접다

                                                                     정태희 삼진정밀 대표

서울 영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중학교에서 2학년까지 다녔다. 3학년 때 대전 대성중학교로 전학 왔다. 대전고 시험에 떨어진 그는 후기였던 대성고를 다녔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부모나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선생을 하라고 했다.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나온 그는 이왕이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싶어 대학원까지 나왔다. 시간강사로 근근이 살아가던 그는 같은 처지의 선배들을 보면서 갈등도 많았다.


시간강사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았다. 무역회사에서 번역 일을 하다가 영업에 눈을 돌렸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적성에 맞았다. 보람도 느꼈다. 그렇게 나이 서른을 넘기면서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살다 흔적 없이 가는 건 무의미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저려왔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앞뒤 안 가리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대전 대덕구 대화동 삼진정밀 본사 전경

아버지는 대전에서 가내 수공업 수준의 사업을 했다. ‘고무다라’도 만들고, 계량기 부품도 납품했다. 땀 흘린 만큼 보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청년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더 나은 사업을 하고 싶었다. 열심히 만든 좋은 제품을 고객에게 파는 제조업이 마음에 들었지만 부가가치가 성에 차지 않았다. 청년의 가슴엔 응어리만 맺혔다.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신경안정제 없이는 잠도 이루지 못했다. 고부가가치 제조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가 본 건 밸브산업이었다.


15평 임대공장, 1,500만원으로 꿈을 펼치다

                                                         인터뷰 도중 야외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독립한다고 하자 아버지가 서운해 했다. 그런 아버지를 떠나 15평의 작은 공장을 임대해 사업을 시작했다. 간신히 구한 1,500만원이 전부였다. 그가 영업을 맡았고, 현재 이 회사의 전무(기술고문)인 황경서(58) 씨가 기술개발을 책임졌다.
대전에 밸브라는 산업이 처음 시작됐다. 대덕구 대화동에 본사를 둔 ㈜삼진정밀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 회사를 이끄는 그는 정태희(53) 사장이다.

 

올해로 삼진정밀이 창사 20주녀을 맞았다.
 
삼진정밀은 지난 4월 창사 20주년을 맞았다. 단 둘이서 시작한 회사는 계열사 3곳을 거느린 어엿한 중견기업이 됐다. 직원 수도 180여 명에 이른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상하수도 밸브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이제는 세계 10대 브랜드가 목표다.

정 사장은 삼진정밀의 성장을 바탕으로 꾸준히 사업영역을 확대해왔다. 2007년 재생용 플라스틱을 활용하는 환경업체인 삼진코리아, 오일, 가스 및 석유화학용 볼밸브 전문업체인 삼진JMC를 잇따라 세웠다. 최근에는 충남 천안의 자원재활용 기업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철도나 지하철에서 사용되는 내연성 친환경소재 파스콘을 생산하는 SP&C다.

매일 새로운 꿈을 꾸다

정 사장이 임대공장에서 시작한 삼진의 20년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기술자인 황 전무가 15㎜ 가정용 밸브를 만들면 정 사장이 내다팔았다. 낮에는 영업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밤에는 일손이 모자라 직접 스패너를 들고 조립작업을 했다. 지금은 4,000㎜ 대구경 밸브와 댐에 사용하는 밸브까지 생산한다. ‘지능형 관망 시스템(상수도용 스마트그리드)’이라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망라한 기술도 개발해 시판하고 있다.

유전이나 석유화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특수밸브는 미국, 중동, 동남아 등 세계 20여 개국에 수출된다. 초정밀 밸브는 국내 유수의 폴리실리콘 생산기업에 공급한다. 폴리실리콘은 태양광의 기초 소재다. 포스코의 지원으로 영하 200도에서 사용되는 특수밸브도 만들어냈다. 이 특수밸브는 포스코의 초저온 라인에 설치됐다. 이 제품은 LNG(액화천연가스) 등 다른 초저온 라인에도 사용된다.

                                           정태희 사장이 회사 홍보관에서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5㎜ 가정용 밸브에서 시작한 삼진정밀의 성공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대표적 모델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기술개발이 회사의 경쟁력이라는 정 사장의 믿음이 있었다. 실제 삼진정밀은 우리나라 기계분야 중소기업 중 두 번째로 많은 특허를 보유한 회사다. 수입에 의존하던 대부분의 관련 기술을 국산화시켰다. 이런 힘은 삼진정밀을 창업 10여 년 만에 상하수도 밸브 업계 국내 1위에 올려놨다. 정 사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일, 가스, 화학용 특수밸브 제조와 중공업 분야까지 진출했다.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기계라는 하드웨어에 시스템, IT 기술을 융복합하는 것.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 세상은 화살같이 빠르게 변합니다. 매순간마다 새롭게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겠죠. 또 뭐든 오래하려면 바르게 제대로 하자는 겁니다. 이 두 가지 화두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하루도 잊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온 덕목입니다.” 경영철학이 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그의 꿈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사장 집무실에 걸린 사훈
 
* 즉 문 즉 답

가장 보람 있었을 때?
“2000년대 초반 부산지역이 중심인 국내 밸브산업에서 국내 1위로 등극했을 때의 짜릿한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밸브산업 제로였던 대전에서 1위 업체로 키웠다는 보람이죠. 솔직히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나만의 보람이지만...”

가장 어려웠던 기억?
“1993년 대전엑스포 당시 납품했던 밸브가 잘못돼 물이 넘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시공 상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죠. 엑스포 시설이 침수될 위기를 막기 위해 콸콸 물이 나오는 밸브를 허리까지 빠지는 상황에서 발바닥으로 막고 두 시간을 버텼습니다. 그 때 침수 문제가 발생했다면 오늘의 삼진은 없었을 테죠.“

머릿속이 복잡할 때 찾는 취미활동?
“워낙 노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노는 자리가 내게는 가장 어려운 자리죠. 바쁘게 사업에 몰두하느라 노는 법을 못 배운 탓도 큽니다. 좋은 취미를 만들려고 노력 중입니다. 다만 저녁에 시간이 나면 아내와 몇 시간이고 걷는 게 유일한 취미예요. 머리가 복잡할 때도 걷다보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정치관이 있다면?
“크던 작던 기업을 하는 사람은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모두가 다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사리사욕 없이 노력하는 정치인을 좋아해요. 어디 그런 정치인 있으면 소개 좀 해 주세요.”

* 신 상 털 기

 

정태희 사장
 
▲출생년도 : 1958년 8월 7일(음)
▲출생지 :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혈액형 : O형
▲학력 : 대성고, 단국대, 단국대 대학원
▲경력 : 제조업 20년
▲가족관계 : 집사람과 1남2녀
▲병역 : 현역 3년 꼬박
▲취미 : 걷기
▲한 달 용돈 : 대중없으나 개인을 위해 사용 하는 게 용돈 이라면 약 20만 원 정도
▲보물 1호 : 가족과 회사
▲재미있게 읽는 책 : 꽤 책을 읽는 편이지만 머리가 심란 할 때마다 읽는 책은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와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자주가는 장소 : 갑천변, 계룡산
▲좋아하는 음식 : 안 가림
▲가장 행복했던 순간 : 미국유학 중인 아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 때
▲노래방 18번 : 바위섬
▲존경하는 인물 : 안철수
▲주량 및 흡연 : 술은 잘 안마시나 어쩔 수 없을 때는 조금 마심. 담배는 처음부터 전혀
▲스트레스 해소법 : 걷기, 잡초 뽑기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 : 좋아 하는 취미거리 만들기. 일 말고 몰두 할 수 있는 것?
▲저서 : 밸브 핸드북(홍릉과학 출판사, 공동번역)

Posted by Paul Fé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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