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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를 만나다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를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봤다. 일반 개봉관에서는 볼 수 없는 짐 자무쉬, 홍상수를 이 곳에서 봤다. 옛날 피카디리 극장을 아트시네마로 꾸며 놓은 곳인데, 시설은 보잘 것 없지만 이런 영화관이 대전에 한 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연출하고, 2010년 제63회 깐느 영화제에서 쥴리에뜨 비노쉬에게 여우 주연상의 영예를 안긴 영화다.


영화는 영국인 작가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가 쓴 에세이 <꼬삐아 꽁포르메(Copia conforme)>의 출판기념회가 열린 이탈리아 투스카니에서 시작된다. <사랑을 카피하다>의 원제는 <꼬삐아 꽁포르메>의 불어 번역인 <꼬삐 꽁포름(Copie conforme)>이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웬지 영화의 본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객들을 유혹하기 위한 낚시밥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로 이뤄진다.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영화에 흐르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드레 브르통의 <나쟈(Nadja)>를 연상시킨다. 편집증 환자인 나자와 브르통의 대화말이다.

남편 없이 아들을 힘들게 키우는 '그녀'(쥴리에뜨 비노쉬)도 일종의 신경증 환자다. 그런 그녀에게 영국인 작가 제임스는 정신분석가다. 그녀의 무의식을 일깨우고, 그녀를 치유해간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도라'의 사례에서 치료에 실패했듯이 이 치료는 실패다. 결말부터 보자면 그렇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으로 가득차 있다. '그녀'가 제임스 밀러의 책 '꼬삐아 꽁포르메'를 여섯 권이나 산 것도 그 책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녀는 골동품, 그것도 진짜 같은 위작을 판매하는 상인이다. 제임스의 에세이집 제목이 바로 '원본같은 사본', 바로 '꼬삐아 꽁포르메'가 아니던가!


제임스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나중에 이 둘의 대화에서 알게 되지만, 나폴리의 광장에서 한 모자를 봤기 때문이다. 항상 먼저 걸어가고, 가끔씩 아들이 뒤따라오는지 살펴보는, 언제나 나란히 걷지 않는 이상한 모자였다. '그녀'는 그 모자가 자신과 아들이라고 믿는다.(아니 정말 이들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제임스의 가이드를 자처하면서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그 곳은 어쩌면 그녀가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 밤을 보냈던 곳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란 암시를 관객들은 받게 된다. 그 곳에서 편집증 환자인 '그녀'는 제임스를 남편으로 대한다. 이렇게 된 것도 철저하게 우연이다. 한 까페에서 주인아주머니가 제임스를 남편으로 생각하자 '그녀'가 제임스를 그렇게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서로의 다른 생각으로 논쟁을 벌이더니 이제부터는 부부싸움을 벌인다. '그녀'는 남편의 부재에 대해, 제임스는 홀로 지내는 안락함에 대해 서로의 주장을 내세운다.(둘의 논쟁을 듣다보면 40대 부부인 우리 부부가 참 공감하는 게 많은 내용이다.) 그러던 둘의 논쟁은 한 분수의 조각상을 놓고 정점에 이른다.

제임스에게 있어 이 조각상은 '꼬삐아 꽁포르메'일뿐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아내가 언제까지나 기댈 수 있는 넓은 어깨, 그리고 그런 감정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걸작품이다. 그녀는 그런 '가치'를 강조한다. 제임스는 그런 그녀의 감정을 잘 알고 있고, 아픔을 딛고 홀로 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부재하는 남편을 원하는 것일까? 그것이 그녀를 위태로워 보이게 만드는 걸까?


오후 5시가 다 되어 늦은 점심도, 이른 저녁도 아닌 식사를 하러갔다가 '그녀'는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귀걸이를 한다.

그런 그녀는 놔두고 제임스는 와인 타령을 한다. 웨이터가 '데귀스따씨옹'(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주문하면 웨이터가 미리 맛보게 따라주는 것)으로 준 와인이 정말 형편없는데도 바꿔주지 않는다, 그런 몹쓸 관례는 무슨 놈의 관례냐는 등 제임스의 불평은 끝이 없다. '그녀'는 정말 화가 치민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남편이 부인을 앞에두고, 분위기를 망치고 있지 않은가!

부부의 식사는 완전 망쳤다. 이 때까지도 제임스는 '그녀'에게 남편이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우쳐 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게뜨 빵 조각 하나씩을 들고 레스토랑을 나온 이들 '부부'는 성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녀'가 성당 안에서 기도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부터 분석가는 '그녀'이고 제임스는 치료를 받는 대상이다.

'그녀'가 제임스를 이끌고 간 한 호텔. 그녀는 호텔 카운터에서 "15년 전 첫날 밤을 보낸 곳이다. 3호실을 잠시 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녀와 제임스는 그 방으로 올라간다. 성당에서 종소리가 여러 차례 울린다. 제임스는 9시 기차를 타야했었다.

제임스는 '그녀'에게 정착하게 되는 것일까?
Posted by Paul Félix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왜 이렇게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지... 영화 <내 이름은 칸>에 대한 감상이 그렇습니다.

 왜 제목이 <내 이름은 칸>일까, 내내 궁금했습니다. 물론 그런 궁금증은 영화를 보고나서 시원하게 풀렸지만 말이죠. <내 이름은 칸>은 감동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 준 영화였습니다. 오르가즘의 여운이 아직 떠나지 않습니다.


리즈반 칸은 아스퍼거 신드롬(Asperger syndrom), 즉 자폐증을 갖고 있습니다. 발달장애를 갖고 있지만 지적능력은 거의 천재수준입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구구절절 외울 정도입니다. 아버지가 일하던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기계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면서 뭐든지 고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 인도 출신 젊은이 '칸(Khan)'. 혀 굴리는 소리를 내어 발음해야 하는 무슬림식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영화의 제목이 왜 <내 이름은 칸>인지를 보면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칸'이란 이름은 무슬림을 대표하는 명사입니다. 폭력에 저항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지고지순한 인류애의 이슬람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서양의 역사는 기원전(BC)과 기원후(AD)로 나뉩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한다면 바로 9월 11일입니다.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일으킨 9.11테러. 9.11테러는 "행복한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현실로 옮겨가는 리즈반 칸을 엄청난 현대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내던져버립니다.


모든 무슬림은 지하드(성전)를 벌이는 과격분자로 매도됩니다. 칸도 그런 격랑 속에서 가족해체의 비극을 겪게 되죠. 아들 샘의 죽음... 사랑하는 아내 만딜라는 '칸'이라는 이름을 저주하게 됩니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칸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지 않았다면..." 아들 샘이 죽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만딜라는 히잡을 두르지 않는 힌두교 신자였거든요.


만딜라는 리즈반 칸에게 자신을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리즈반은 언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만딜라는 대통령을 만나 "내 이름은 칸입니다. 그리고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돌아오라고 합니다. 리즈반은 실제 그렇게 하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되죠.


하지만 평범한 시민이 어디 대통령을 만나는 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뭐든지 고쳐드립니다"라는 피킷을 들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번 돈으로 여비를 삼아 대통령을 만나는 여정을 계속하죠.


그러다 조지아주의 한 마을에서 이라크 전쟁에서 큰 아들을 잃은 마마제니 모자를 만나게 되고, 크리스찬이든 무슬림이든 인류애를 실천하는 사람들임을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다르지 않다는 칸 어머니의 말씀은 크리스찬이든 무슬림이든 다르지 않다는 말씀, 모두 인류애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철저한 준비 끝에 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칸의 몸부림은 계속됩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를 외치다가 칸은 그만 테러리스트로 오인되어 투옥되고 맙니다. 한 무슬림 기자에 의해 칸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며 오히려 테러리스트 고발자임이 드러나게 되어서야 칸은 석방됩니다.

사람들은 칸이 왜 대통령을 만나려는지, 그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지 궁금해합니다. 미국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된 것이죠.


조지아주에 허리케인의 공습이 발생하자 리즈반 칸은 마마제니를 구해야 한다며 떠납니다. 대통령을 만나는 걸 뒤로 한 채 말입니다. 언론은 이런 칸의 봉사활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조지아주의 마마제니가 사는 마을로 미국의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듭니다. 칸이 미국을 감동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만딜라와 리즈반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새롭게 당선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칸의 메시지를 전달받게 되죠.

"My name is Khan, and I'm not a terrorist".


영화 <내 이름은 칸>을 보시려면 반드시 손수건을 준비하세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거든요.... 감동의 여운이 두고두고 남는 영화 <내 이름은 칸>이었습니다.
Posted by Paul Félix
시대의 트랜드가 1세기가 아니라 10년, 아니 더 단축되고 있는 초정보화사회. 종교나 철학, 명상은 거리가 멀어보이는 그런 시대지만 영화들은 그런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Hereafter)>가 그런 영화입니다.

<히어애프터>는 죽음을 보는 남자, 죽음을 겪은 여자, 죽음과 함께 사는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성찰하는 영화입니다.


조지(맷 데이먼)는 평범해 보이지만 특별한 능력,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가 '초능력'이라 부르는 능력을 가진 남자입니다. 다른 사람과 손을 잡으면 그 사람과 가장 관계가 있는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되고,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세실 드 프랑스)는 프랑스 뗄레비지옹의 유명한 앵커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애인(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PD)과 바캉스를 떠났다가 쓰나미를 만나 죽음의 세계를 다녀오는 특별한 경험을 했지요.


마커스는 쌍동이 형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채 그의 영혼을 찾아 헤매입니다. 쌍동이 형의 죽음을 살고 있는 소년입니다.

영화는 서로 다른 이 세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각각 담아냅니다. 세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죠. 조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리는 프랑스 파리, 마커스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셋이 런던에서 조우하는 것으로 영화는 한 편의 영화가 됩니다.

영화 <히어애프터(Hereafter)>는 말 그대로 여기가 아닌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여기(here)에 엄연히 존재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히어애프터>는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색, 죽음에 대한 성찰로 가득 채워진 영화입니다.

죽음은 종교적인 주제일 수 있고, 철학적일 수도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걸 떠나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아마도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이스트우드적인 죽음의 성찰이 있습니다.


리딩(reading), 즉 죽은 영혼을 보고 그 영혼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란 게 사실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지는 자신의 리딩 능력을 '축복'이라며 비즈니스로 연결시키려는 형 빌리와 달리 '저주'로 여기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걸 과대망상의 하나로 봐야하는지, 아니면 있을 수 있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능력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나의 삶과 깊게 관계되어 있는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내 삶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영화에서 이 '리딩'의 능력을 관객으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건 아무래도 마리인 듯 합니다. 마리는 죽은자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무중력의 세계를 경험했고, 닥터 루소 여사를 만나 확신을 하게 되거든요.


우연의 일치겠지만 마리가 그런 확신을 갖게 됐을 때, 조지는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자신이 평소 열렬히 좋아하는 찰스 디킨즈의 생가 등을 방문하기 위해 런던으로 갑니다. 런던 북페어에서 조지는 소년 마커스를 만나게 됩니다.

조지는 마커스의 형 제이슨의 영혼을 리딩하면서 마커스에게 "너의 안에 제이슨이 있다. 너와 제이슨은 하나"라고 말해줍니다. 소년 마커스가 구원을 받는 장면이죠.


그리고 마리와의 만남.

자신만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그런 능력에 대한 책의 저자인 마리를 런던북페어에서 만난 건 어찌보면 필연입니다.


소년 마커스가 조지에게 "아저씨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부르는 마리와의 만남을 통해 조지는 자신만의 능력이 '저주'가 아님을 확신하게 되죠. 마리도 자신이 쓰나미로부터 잠깐 경험했던 환영이 환영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구요.

죽음을 보고, 죽음을 겪었고, 죽음을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서로서로를 통해 구원에 이릅니다.

<히어애프터>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리딩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도, 무중력의 죽음의 세계, 즉 '히어애프터'가 실재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영화도 아닙니다. 단지 그런 방편을 통해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삶의 연속일 뿐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큰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나고, 태어나면서 어떤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태어남도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살다가 죽습니다. 그 죽음도 선택적인 일은 아니죠.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스토아 철학자, 즉 현자들은 그래서 '현명한 선택', 그리스어로 '헤레시스'를 강조합니다. 영어사전에 '이단'이라고 해석되어지는 헤레시스는 '태어나서 살다 죽는' 그런 삶에서 특별한 선택을 강조하는 것이죠.

죽음을 삶의 일부로 여기는 그런 깨달음이 있을 때에만 '헤레시스'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히어애프터>를 보고 나니 쥴리아 로버츠 주연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가 자연스럽게 연상됐습니다. 두 편의 영화가 '헤레시스'의 교훈을 깨닫게 해 줄 것 같거든요.
Posted by Paul Félix
장기 상영 덕에 관람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블랙스완(Black Swan)>은 히스테리적 망상의 극치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연출자인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니나 세이어스(나탈리 포트만)의 히스테리적 망상을 놀라울 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니나의 망상에는 누군지 모를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관객들을 섬뜩하게 만들 정도의 여인은 유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여인은 니나 자신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니나의 대역을 맡게 된 경쟁자 릴리(밀라 쿠니스)로 구체화되기도 합니다.


먼저 니나의 방을 보면 인형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화가(?)인 어머니의 방에는 소녀의 초상들로 가득합니다. 니나를 항상 "예쁜 소녀"라고 부르죠. "예쁜 소녀", 그렇습니다. 니나는 항상 예쁜 소녀입니다. 신체적으로 성인이 다 된 여인의 몸이지만 그녀는 소녀이어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히스테리는, 히스테리라는 그 단어의 라틴어 어원  'hustera'가 자궁을 뜻하는 것처럼 성적인 억압이 가해질 때 발생합니다. 우리말에 '노처녀 히스테리'란 표현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뉴욕 발레단의 총연출자 토마스 르로이(뱅상 카셀)도 니나에게 남성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성'을 요구합니다. 토마스는 니나를 키스하고, 도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니나에게 그런 여성성을 갖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토마스로부터 키스를 받고, 그의 입술을 깨물고 난 후 뜻밖에 백조와 흑조의 1인 2역을 맡아야 하는 'Swan Queen'에 캐스팅됐을 때 그녀의 망상은 거울에 루즈로 그려진 'W.H.O.R.E.'(창녀)를 그려넣습니다.

이는 성적욕망에 대한 니나의 저항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 니나의 망상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여인, 도발적이고 섹시하기까지 한 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나의 망상에는 그녀를 바라보는 유령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니나가 아버지가 없는 가정,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쁜 소녀'이어야 하는 니나도 부재하는 아버지를 갈망했던 여자 아이였을 테고, 니나의 망상에 등장하는 '유령'은 바로 아버지를 욕망하는 니나의 분신일 터입니다. 여기서 니나가 망상으로 만들어내는 유령은 아버지를 갈망하는 어머니의 경쟁자 뿐입니다. 예쁜 소녀일 수밖에 없는 니나가 아버지를 욕망하는 자신의 유령을, 즉 어머니의 경쟁자 혹은 어머니에 동일시된 그런 유령을 망상으로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심지어 니나는 뉴욕발레단의 토마스를 욕망하는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나는 당신을 욕망할 자격이 있는 여인이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니나의 망상은 신입배우 릴리의 등장으로 점점 정신분열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릴리가 칵테일에 탄 엑스터시를 마시기도 했지만 그녀는 망상 속에서 릴리와 뜨거운(?) 밤을 보냅니다. 자신의 몸을 만지면서 성적충동에 빠지기도 합니다. 니나의 망상에서 경쟁자가 어머니에서 릴리로 바뀌고 있는 것이죠.


니나가 뉴욕발레단의 전직 'Queen'이었던 베스 메킨타이어(위노나 라이더)의 화장품 등을 분장실에서 훔쳤던 걸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니나 자신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토마스는 바로 니나의 망상에서 유령이 욕망하는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니나가 망상에서 릴리와 동성연애 행각을 벌인 것도 릴리가 토마스를 사이에 둔 경쟁자(어머니의 상)가 아니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연출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뉴욕발레단이 니나를 새로운 'Swan Queen'으로서 '백조의 호수'를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날이 밝기 전 날, 니나는 토마스와 릴리의 격렬한 섹스신을 망상으로 연출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니나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생활을 엿본 소녀의, 어머니를 경쟁자로 여기는 '예쁜 소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백조를 연기하다 추락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 니나는 자신의 분장실에서 대역으로 나가겠다며 릴리가 흑조로 분장하는 망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는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깨진 거울 조각으로 릴리를 힘차게 찌릅니다.


경쟁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흑조' 니나는 마지막 힘찬 몸짓, 격정적이며 세상의 모든 남성을 유혹할 것같은 몸짓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습니다. 니나는 더 이상 '예쁜 소녀'가 아닙니다. 토마스가 원했던, '스완 퀸'이 된 것이죠.


그리고 니나는 망상을 조작하는 걸 멈춥니다. 자신이 깨진 거울 조각으로 힘차게 찔렀던 건 릴리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던 걸 깨닫게 된 순간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은 섬뜩할 정도로 히스테리적 망상을 잘 보여준 영화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Posted by Paul Félix
영화 <킹스스피치>는 정신분석 치료의 전형을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영국 왕 조지 5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버티(알버트)는 해군장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재목이지만 심한 말더듬이입니다.

아버지 조지5세를 대신해 왕자 전하이자 공작인 자신이 연설문을 낭독해야 하지만 번번히 말을 더듬습니다.

이를 치료하려하지만 번번이 실패하죠. 말더듬는 증상이 있다면 그 심리적 원인이 있을 텐데 버티가 이를 깨달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혀의 운동성 등 신체적인 문제로만 치부합니다.


아마추어 배우였고, 전쟁으로 말을 잃은 군인들과 대화하며 언어치료를 하게 된 라이널 로그는 마치 프로이트처럼 버티를 대합니다.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버티의 성장과정을 들으려 합니다. 그러면서 그 원인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싶었던 거죠.

하지만 버티는 자신이 말더듬이 증상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심하게, 반복적으로 저항할 뿐입니다.

버티가 말 더듬는 증상을 보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위치, 즉 왕위를 물려받는 건 형 데이빗(훗날 에드워드 8세)이지 자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합니다.

요컨대 버티에게는 왕의 위치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이 있는 것이죠. 그게 말더듬는 증상으로 나타난 걸로 보여집니다.



조지5세의 죽음으로 왕위후계자 1순위인 형 데이빗이 에드워드8세로 등극하지만, 세기의 스캔들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납니다. 버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지5세가 될 운명인 것이죠.


치료사 라이널 로그는 이런 버티의 운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버티가 스스로 왕위를 욕망하면서, 그 욕망을 억압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그런 라이널에 버티가 저항하면서 치료는 중단된 듯 보입니다.

그러나 뜻밖의 해법을 제시하는 건 바로 라이널의 부인입니다.


로그부인은 "버티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할 사람인데..."라며 푸념하는 남편 라이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죠".

생뚱맞게도 로그 부인이 버티와 일면식도 없었고, 그와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버티가 왕위를 원하지도 않으며, 왕위가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왕위논쟁으로 불거진 버티와 라이널의 관계는 버티가 라이널을 찾아오면서, 그리고 자신의 개인 치료사로 라이널을 지속적으로 고용하면서 회복됩니다.

그리고 조지6세는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연설을 해야 합니다. 말 더듬이 조지 6세가 과연 영국 국민과 50여 대영제국 국민들에게 세계평화를 위한 나치에 대한 저항을 잘 호소할 수 있을까요?


그건 이제 전적으로 버티의 몫입니다. 왕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하는 것은 바로 버티 본인이니까요. 사실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다는 욕망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말입니다.


영화 <킹스스피치>는 버티의 성장과정을 통해 그가 왜 말 더듬이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원인을 스스로 분석함으로써만이 극복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건 조지6세의 평민 친구인 라이널 덕분이겠지만요...

"버티, 당신은 왕이 되고 싶었잖아!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잖아!" 버티가 이런 무의식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을 겁니다. 버티가 아니라 조지6세가 된다면 말이죠.
Posted by Paul Félix

영화제목이 왜 만추(晩秋)일까? 나중에 알고보니 1960년대 고()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메이크했다고 하더군요. 아내는 현빈이 나와서, 나는 탕웨이가 나와서, 그리고 오래간만에 멜로 좀 감상하려고 봤을 뿐인데 말이죠.


만추(晩秋), 우리 말로 늦가을, 영어로는 'late autumn'. 영화 <만추>는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애나는 남편을 살해하고 7년간 복역한 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오빠가 넣어준 보증금 덕분에 3일간의 특별휴가를 얻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완전 양아치, 훈은 특별휴가를 위해 시애틀행 버스에 오른 애나에게 30달러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훈은 돈 많은 한국여자를 후려치면서 먹고 사는 인간 말종이죠.



이 둘이 사랑에 빠진다? 영화가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스토리인데, 결론적으로 참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한국인 훈과 중국인 애나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애나가 왜 남편을 살해했는지, 그녀는 넋두리처럼 훈에게 중국어로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습니다. 훈이 알아 듣지 못하니까요...


훈과 애나는 정신병동의 의사와 환자처럼 보입니다. 애나는 아픈 과거로부터 서서히 치유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날 찾아온 훈, 그가 애나의 첫사랑 왕징과 싸움을 벌입니다. 장례식날, 싸움박질이라니!  훈은 둘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엉뚱하게도 "이 사람이 내 포크를 썼다"며 화를 냅니다. 애나는 왕징에게 "왜 다른 사람의 포크를 썼느냐"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애나의 '카타르시스'입니다.


미국인 부자 남편(마피아일지도 모릅니다)과 사는 옥자는 훈에게 돈을 주고 사랑을 구걸합니다. 훈은 그런 놈입니다. 시애틀에서 애나와 마지막 밤 거리를 거닐던 훈은 옥자의 전화를 받고 한 호텔로 갑니다. 그 호텔에서 옥자는 "너를 봤으니 됐다"며 돈봉투를 건넵니다.


애나가 교도소로 돌아가는 날, 안개 때문에 버스가 휴게소에 멈춥니다. 거기서 훈은 옥자의 남편을 만납니다. 남편은 "왜 옥자를 죽였느냐"고 훈에게 묻습니다. 아무도 옥자를 누가 죽였는지, 혹은 옥자가 자살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훈은 옥자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고, 유력한 용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훈은 안개 속에서 애나와 진한 키스를 나눕니다. 옥자가 왜 죽었든, 훈은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제는 애나가 그런 훈의 아픔을 치유해줍니다. 훈은 애나에게 출소하는 날 이 휴게소에서 다시 만나자고 합니다. 그리고는 경찰에 체포됩니다.


2년후 애나는 출소하고 휴게소에 도착합니다. 버스는 시애틀로 출발하지만 여전히 애나는 그 휴게소 카페에 앉아서 훈을 기다립니다....

아마 애나는 1년 뒤 바로 그 날에도 이 곳에서 훈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1년, 또 1년... 사랑이란 감정을 잊어버린 두 사람에게 어느날 불쑥 찾아온 그런 사랑을 말입니다.

영화 <만추>는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힘은 위대하리니....
Posted by Paul Félix
어제밤 12시에 <생텀(sanctum)>을 혼자서 봤습니다. 아내와 함께 <친구와 연인사이>를 봐야 할 이유가 있어서 보러 갈 것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입니다. ㅠㅠ


<생텀>은 남태평양 파푸아뉴기니의 에사 알라(Esa'Ala) 동굴을 탐험하다 해저의 미로에 갇힌 사람들의 탈출 이야기입니다.


#1. 우선 저 거대한 땅 속 세계로 통하는 구멍은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는 그런 곳처럼 보입니다. "동굴의 어머니"이자 이 세상의 자궁이라는 느낌을 주는 공간이죠.

                                                                                                     <네이버>

탐사대의 대장이자 주인공인 조쉬 맥기어의 아버지인 프랭크 맥기어가 "동굴은 나에게 가장 편안한 곳", "마치 교회와도 같은 곳"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왜 영화제목이 <생텀>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텀(sanctum)>은 라티어 어원 '산투아리움(sanctuarium)>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신의 숭배에 이용되는 성스러운 장소를 뜻하죠.

영화에서 아버지 프랭크가 온 몸의 뼈가 으스러져 고통하는 한 원주민 대원(이름이?)을 물 속에서 질식사시키고, 조쉬가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 프랭크를 같은 방식으로 보내드리는 것처럼 동굴 속은 사람이 어머니 자궁 속에서 나왔듯 다시 그 곳으로 돌려지는 그런 장소와도 같습니다.


실제 고대 가톨릭에서는 '카타콤베(catacombe)'라고 해서 지하에 갱도를 파고 묘혈을 만들어 그 안에 시체를 안치했습니다. 카타콤베는 그러니까 지하묘지죠. 갱도를 확대하면서 '산투아리움'을 곳곳에 만들어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요컨대 영화 <생텀>에는 '자궁 숭배'의 코드가 담겨 있다는 거죠.

#2.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아바타>에서 처럼 대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이 될 것을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 프랭크가 이런 말을 했죠. "우리 인간은 이 거대한 동굴에서 스쳐가는 먼지에 불과할 뿐"이라고...


정말 이 지구는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대자연을 품고 있습니다. 대자연에 순응하면서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건 카메론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인 듯 합니다.

하나 더...

#3. 이 땅을 사는 한 명의 아빠로서 언제나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괜시리 찡한 느낌을 줍니다.


언제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독선적이고 자기 맘대로인 아버지 프랭크에 대해 아들 조쉬는 반감을 갖습니다.

하지만 칠레 광부들이 다시 햇빛을 보기까지 리더십의 기능을 굳이 떠들어댄 신문기사가 아니더라도 아버지 프랭크는 지독한 해저미로에서 탈출하고 생존하기 위한 그런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서바이벌 게임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된 조쉬가 그런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괜시리 찡해집니다. 왜? 저도 아빠니까요...


<생텀>, 결론적으로 참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Posted by Paul Félix
딸과 함께 <나니아연대기3>를 4D로 보고, 오늘은 아내와 아들 녀석을 데리고 <걸리버여행기>를 3D로 봤습니다.

<나니아연대기3>를 4D로 봐야할 그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던 터라 <걸리버여행기>만은 2D로 보려 했지만 3D와 4D로만 개봉을 했더군요.

'무슨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걸리버여행기>를 봤지만 정말 왜 이 영화를 색안경을 쓰고 앉아서 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일반영화보다 무려 5천원이나 더 비싼 3D. <아바타>라면 3D로 봐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지만 정말 이건 아니더라구요. 그냥 봐도 될 영화를 굳이 3D로 만들어 개봉하는 건 분명 장삿속입니다.  짜증부터 났었던 게 사실입니다.


어릴적 동화책으로만 읽었던 <걸리버여행기>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이죠. 소인국, 거인국,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의 나라 등을 여행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미지의 세계를 기행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영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이라고 하지요.

2011년 개봉한 <걸리버 여행기>는 할리우드의 코드를 읽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키 만큼이나 쪼잔한 소인배들이 사는 소인국, 릴리풋에 표류한 걸리버는 미국의 소시민입니다.


신문사의 우편배달 사원으로, 달시를 열렬히 짝사랑하죠.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표절'을 통해 버뮤다삼각지의 비밀을 파헤치는 기사를 쓸 적임자로 뽑히게 된 겁니다.


릴리풋의 경쟁국가로부터 납치 위기에 빠진 공주를 구하고, 화재 속에서 왕을 오줌싸기로 구해내면서 이 뉴욕의 소시민이 소인국의 영웅이 됩니다. 더구나 적국의 함대를 혼자서 무찌르기까지 합니다. 여기까지는 스위프트의 '동화'가 우리에게 들려준 그 낯익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영웅으로서의 삶을 즐기던 걸리버에게 위기가 닥치죠.


생뚱맞게 등장한 릴리풋의 장군이자 공주의 약혼남인 에드워드가 아이언맨으로 등장한 겁니다.

릴리풋에서 쫓겨나 결코 가지 말아야 할 섬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죠. 거기서 달시가 대신 버뮤다삼각지대의 비밀을 캐러왔다가 역시 릴리풋으로 표류한 달시가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거인의 섬에서 인형이 되었던 걸리버는 탈출을 하고, 다시 로봇캅과 맞장을 뜹니다. 이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할리우드의 영웅으로서 말이죠.


릴리풋의 왕과 경쟁국의 왕이 다시 격돌하려하자 걸리버는 미국식 '평화주의'를 락음악을 통해 개입합니다.  그냥 웃고 즐기는 신나는 락음악에 맞춰 평화를 외치는 걸리버에게 찌질이 소인들은 커다란 감동을 받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걸리버는 대국인 미국의 표상입니다. 걸리버가 싸우지 말라면 싸움을 멈춰야 하는거죠. 물론 싸우는 건 나쁜 일입니다. 영화 <걸리버여행기>는 세계의 경찰 미국, 소련 해체 이후 이제는 중국이 소련을 대신하는 G2 세계구도에서 우월한 미국에 대한 향수가 짙게 그려진 그런 영화일 뿐입니다.

그냥 봐도 될 걸 굳이 색안경끼고 3D로 봐야 하는 강요까지 받으면서 말입니다.
Posted by Paul Félix
영화 <물랑루즈(Moulin Rouge>는 호주 출신 바즈 루어만 감독이 연출하고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비극적 사랑을 연기한 2001년 작품입니다. 뮤지컬 형식을 취했습니다.


19세기 말 프라스 파리 사교계의 정점인 물랑루즈에는 파리의 모든 권력과 돈, 그리고 남자들이 모여드는 장소입니다. 이 곳 물랑루즈의 아름다운 뮤지컬 가수 샤틴에게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상승과 성공을 위해 야심을 가지고 있던 샤틴은 아무에게도 관심을 내비치지 않습니다.

우연히 파리에 머물게 된 젊고 이상에 사로잡힌 시인 크리스티앙은 기인 화가 로트렉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이끌려 물랑루즈에 오게 됩니다.

한편 샤틴을 차지하기 위해 흑심을 키우던 몬로스 공작은 샤틴을 위해 화려하고 현란한 물랑루즈의 새로운 쇼를 열어주게 되고, 샤틴과 크리스티앙, 그리고 몬로스 공작 사이에 미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됩니다.

부르주아적 삶에 지쳐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물랑루즈라는 신비의 세계에 합류한 크리스티앙은 샤틴을 위해 자신을 헌신해 갑니다.

하지만 샤틴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슬픈 운명이 놓여 있지요.


영화 <물랑루즈>는 '금기된 사랑'에 도전하는 비극(tragedy)의 전형적 구조를 보여 줍니다.

물랑루즈는 낭만과 사랑, 향락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 공간의 여주인공 샤틴에게 사랑은 금기시된 그 무엇입니다.

이는 이 영화가 19세기 말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정신분석을 완성해 나간 것은 무엇보다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스테리(hysterie)의 라틴어 어원이 '자궁(hustera)'을 의미한 다는 거죠.

히스테리는 성적 억압에 의해 나타나는 징후이거든요. 우리나라 말에도 '노처녀 히스테리'란 말이 있다는 건 참 재미 있는 현상입니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19세기 말은 부르주아의 몰락이 극명하게 나타나던 시기였죠. 매춘이 극심했을 정도로 풍기문라이 심각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제도적으로 성적 억압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제도적 억압과 개인의 성적 욕망이 충돌할 때 히스테리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히스테리의 병적 구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춤과 노래로 자신의 욕망을 승화시키던 샤틴은 크리스티앙을 만나 억압과 분출이라는 두 에넞의 팽팽한 긴장상태에 놓이게 되고, 끓어오름에도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은 영화 속에서 '폐결핵'이란 징후로 나타납니다.

또한 방해자 몬로스 공작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이 두 청춘남녀의 애정행각은 영화 속에 또 다른 서사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이 공연하려는 연극이 바로 그것인데, 텍스트의 구조에서 이 연극이 이들의 욕망을 담아냅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원래가 금지된 사랑이었기 때문이죠.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에는 반드시 응징이 따릅니다. 그 응징은 금기로부터 사회를 지탱시키는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Paul Félix
영화 <페이스오프(Face off)>는 홍콩에서 성공적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오우삼 감독이 홍콩의 문법을 할리우드식 껍데기와 스타시스템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줬던 1997년 작품입니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존 트라볼타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는 그 이름값 만으로도 영화의 무게를 더해줬죠.


불굴의 의지를 가진 FBI요원 숀 아처는 자신의 어린 아들 마이키를 죽인 잔혹한 범죄자 캐스터 트로이와 격돌합니다. 청부 터러범 캐스터는 LA 어딘가에 생화학폭탄을 설치했습니다. 힘든 싸움 끝에 숀은 캐스터를 체포하지만 그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숀은 이미 수감된 캐스터의 동생 폴룩스로부터 폭탄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FBI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캐스터와 자신의 얼굴을 통째로 맞바꿉니다. 이는 죄수로 위장해 폴룩스가 수감된 감옥에 잠입하기 위한 것이죠.


하지만 이 사실을 알리없는 간수들은 숀을 혹독하게 괴롭히고 캐스터는혼수상태에서 깨어납니다. 캐스터는 의료진을 협박해 숀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이식하고, 숀과 자신의 얼굴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요원들을 모조리 살해합니다. 숀으로 변신한 캐스터는 숀의 인생을 철저히 파멸시키려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숀은 가까스로 감옥을 탈출해 캐스터의 아지트로 잠입합니다. 캐스터의 지시를 받은 경찰 특전단과 범죄단, 숀과 캐스터가 격전을 벌이고 드디어 죽은 마이키의 생일날,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이 펼쳐집니다.



이 영화에서 얼굴이 맞바뀐 숀과 캐스터는 결국 한 사람입니다. 액션의 서스펜스로 영화의 재미에 넋이 빠진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면 누가 숀인지 누가 캐스터인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죠. 이 때문에 <페이스 오프>는 포스트모던 논란을 일으키며 홍콩감독 오우삼을 확실한 할리우드 스타감독으로 입지를 다져주기도 했지요.

이 영화에서 악의 편에 선 캐스터는 무의식적 본능(id)의 표상입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고 즉각적으로 자신의 욕망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그 속에서 쾌락을 만끽하죠.

반면 숀은 초자아(superego)의 충실한 표상입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윤리의식을 일깨우고 가정에서는 엄격한 아버지이자 위엄 있는 가장이 되고자 합니다. 숀은 철저하게 '사회화'된 인물인 셈입니다.

이 영화의 텍스트 구조는 이처럼 무의식과 초자아의 격전장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상반된 두 인물형을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인물의 전형'을 파괴하고 해체합니다. 관객들은 표상이 뒤바뀐 선-악의 대결에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어지죠.



'가면'을 쓴 캐스터는 숀의 가정에서 '대리 가장'으로서 숀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합니다.

가령 이 가짜 숀은 아내와의 성생활에서, 자유분방한 자식교육에서 숀과 전혀 다른 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악 그 자체이지만 관객들은 드문드문 드러나는 이 가짜 숀의 역할에서 더 이상 캐스터를 발견하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캐스터로 변한 숀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의 가면을 쓴 숀은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폭력의 미학'에서 희열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결국 영화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자아의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는 거지요.

이는 숀이 자신의 아들 마이키를 살해한 불구대천의 원수인 캐스터를 제거한 후, 캐스터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온전한 주체로서 완전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Posted by Paul Fél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