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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를 만나다

역발상(逆發想). 원래 국어사전에는 없는 단어다. 생각이 떠오른다는 ‘발상’에 ‘거꾸로’라는 ‘역’이 더해져 만들어진 조어(造語)다. ‘발상’, 즉 원래 있는 생각과 반대로 생각해 보라는 의미다. 의례적인 사고를 탈피하라는 뜻으로도 자주 쓰인다. 뜻밖의 아이디어가 히트상품을 만들고 행정혁신을 이룬 사례가 속속 알려지면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필수덕목이 돼버렸다.

강연 중인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

 

반전의 삶에 대한 헌사 ‘역(逆) 창(創) 락(樂)’

 

 

역발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맥키스컴퍼니 조웅래(55) 회장이다. 술 만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건강과 휴식을 떠들고 다니니 그보다 역설적인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004년이었다. 다니던 신문사에 3부작으로 향토 소주회사 선양의 30년 비사(祕史)를 탈고(脫稿)한 직후였다. 그는 무너져가던 소주회사의 인수자 자격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창업영웅’으로 통하던 벤처기업 1세대, 그런 사람이 소주회사를 사들이다니! 가치관의 혼돈이었다.

‘왜?’라는 물음에 그는 “점유율이 낮으니 다시 높아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정작 그와 얼굴을 맞대고 인터뷰를 한 건 2012년 9월초였다. 우리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관심이 컸을 때였다. 작정하고 사람들을 만났고 ‘CEO 리더십분석’이란 기획시리즈를 연재했다. 그는 내가 만난 첫 기업 CEO였다. 그리고 그의 리더십을 ‘역(逆) 창(創) 락(樂)’으로 정의했다.<2012년 9월 2일, 디트뉴스, “반전의 삶, 대중을 즐겁게 하라”> 뒤집어 생각하니(逆) 새로운 일이 비롯되고(創) 이로써 대중을 즐겁게(樂) 한 그의 삶에 대한 오마주(헌사)였다.

 

3년여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지난 5월 22일 오후 대전 서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2015년 서람이 자치대학’에서다. ‘역발상을 다시 역발상하라’는 주제의 강연이었다.

 

“창조란 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호기심가지고 해보는 게 창조입니다.” 그의 강연이 시작됐다. 역(逆)으로부터 창(創)하고, 락(樂)으로 귀결된 그의 인생 이야기는 3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가 무미건조한 대전을 판매하는 최고의 도시마케터가 돼 있었다는 점이다.

 

KT 전화선을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활용

그는 공대를 나왔다. 대기업 엔지니어로 취업했지만 곧 그만뒀다.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아서였다. 존재감 있게 일해 보려고 중소기업을 찾아갔지만 또 그만뒀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회사가 관심을 안 보여서다. 애초부터 그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화기가 다이얼에서 버튼 식으로 바뀌고 유선망 보급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다방에서 그의 눈에 운세 재떨이가 들어왔다. 불현 듯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 운세였다. 침대 밑에 기계를 놓고 음성으로 운세를 제공하는 700-8484(팔자팔자) 서비스를 시작했다. 1인 기업이었다. 단소 소리를 배경으로 인기 중국드라마 ‘포청천’의 성우가 운세를 알려줬다. 처음 성공을 맛봤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소리를 들려준다’는 발상의 전환은 삐삐, 휴대폰으로 이어졌다. 무선호출기, 이른바 ‘삐삐’가 보급되면서부터다. 삐삐 사서함에 음악을 저장해 놓으면 목소리와 멜로디가 함께 나왔다. 이를 기반으로 휴대폰 벨소리와 컬러링도 선보였다. 크리스마스카드 대신 ‘700-5425’를 통해 캐럴송을 선물할 수도 있었다. 음악으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발상에 대중은 열광했다.

 

‘봉이 김선달’ 식 발상의 과학적 실현

 

조웅래 회장의 강의는 매번 '뻔뻔(Fun Fun)한 클래식'의 여주인공인 소프라노 정진옥의 '뻔뻔한' 가곡으로 시작된다.

 

‘5425’는 국내 모바일콘텐츠업체 부동의 1위였다. 브랜드 위상을 지키기 위해 연매출의 1.5배가 넘는 자금을 광고비로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신사업 구상에 골몰했다. 일종의 출구전략으로도 해석된다. 유선망을 강력한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이용했지만 무선망은 개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 더구나 스마트폰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속가능한 사업을 찾고 있던 그의 눈에 대전‧충남의 향토소주회사인 ㈜선양이 들어왔다. “소리든 술이든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점유율이 낮으니 높일 수 있다고, 망해가니까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IT 벤처신화 주인공의 생뚱맞은 변신이었다.

 

당시 선양은 ‘은(銀) 충진 여과공법’과 국내 최초 알코올 21도의 ‘새찬’을 출시해 점유율 상승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는 대표이사(회장) 취임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찬’ 생산을 중단시켰다. 대신 ‘오투린’을 내놨다. ‘산소가 3배 많아 30분 먼저 깬다’는 광고 카피와 함께 등장해 지금까지 장수하고 있는 제품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마시는 산소(O2)를 소주에 넣다니! 대동강 물 팔아먹은 현대판 ‘봉이 김선달’ 아닌가! 그런데 ‘산소 용존 기술’이란 특허를 국내외에서 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기술은 국내 연구진에 의해 세계적 학술지에도 소개됐다. 산소를 소주에 넣겠다는 발상도 그에게서 나왔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포항심층수를 마셨더니 술이 빨리 깼어요. 알고 보니 산소가 30피피엠(ppm) 들어가 있더라고요. 산이나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면 덜 취하고 빨리 깨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그가 ‘유레카’를 외친 순간이었다.

 

소주회사를 에코힐링 기업으로

계족산 맨발 축제.

 

그는 서서히 자신의 ‘끼(氣)’를 회사 경영에 이식시켜나갔다. 대표적인 게 계족산 황톳길 조성.

 

 

어느 날 마산고 시절 자취집 친구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그는 매력에 흠뻑 빠져 지내던 계족산으로 친구들을 데려갔다. 하이힐을 신고 있던 여자 친구에게는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줬다. 그리고는 맨발로 자갈이 섞인 산길을 다섯 시간이나 걸었다. 발이 성할 턱없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몸 전체가 후끈거리고 잠도 푹 잤다. ‘맨발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감탄과 함께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발바닥에 모든 장기가 연결돼 있다고 하잖아요?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이 잘 되고, 불면증, 우울증, 붓기, 생리불규칙 등에 좋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발 벗기를 꺼려하죠. 발에 상처가 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신발을 벗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곧 산길의 자갈부터 걷어냈다. 그리고는 마사토를 깔았다. 거칠거칠한 게 촉감이 좋지 않았다. 색깔도 예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다시 황토를 깔았다. 붉은 색이 사람의 몸에 가장 빨리 반응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게 편안했다. 햇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느낌도 새로웠다. 낙엽이 떨어져 황토에 자국을 남기면 그대로 그림이 됐다. 그렇게 황토가 깔린 길이 14.5㎞나 된다.

 

이제는 사람들을 계족산으로 모이게 만드는 일만 남았다. 그는 사람들이 함께 걷고 뛰는 행사를 기획했다. 마사이마라톤. 하루에 3만보 이상을 맨발로 걷는 마사이족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자연(ecology)과 치유(healing)를 합친 ‘에코힐링(Ecohealing)'이란 개념을 만들어 상표권까지 등록했다. 소주 만드는 회사가 ’에코힐링 기업‘이 된 것이다. IT 벤처신화 주인공의 변신만큼이나 짜릿한 반전이다.

 

‘익사이팅 대전’ 만들어 알린 도시마케터

 

황톳길 조성, 음악회, 축제 등의 콘텐츠가 가미되면서 계족산은 대전의 최고 명물이 됐다.

 

사람들이 많이 와 걷고 나면 황톳길이 굳어지기 마련이다. 비만 오면 흙이 쓸려나갔다. 그래서 새벽이면 황톳길을 뒤집고, 물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고용한 직원들이다. 그는 매일 새벽 계족산을 오르며 황톳길을 살펴본다. 언제부턴가 그에게 ‘황톳길 작업반장’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그의 명함 한편, 캐리커처 아래에 이런 직함이 쓰여 있다.

 

 

맨발로 걷다가 그냥 헤어지는 게 싫었다. 언제나처럼 생각하나가 불현 듯 떠올랐다. ‘산속에 성악가와 피아노를 올려보자!’ 그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름다운 소프라노’ 정진옥을 단장으로 맥키스오페라단이 창설됐다. 숲속에 상설공연장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선 4월 둘째 주부터 10월말까지 매주 토, 일요일 오후 3시면 어김없이 ‘뻔뻔(Fun Fun)한 클래식’을 만날 수 있다. 정장 입고 음악회 가는 2%의 국민이 아니라 티셔츠 차림의 98%를 위한 공연이다. 3대가 함께 깔깔거리며 즐기는 음악회다. 클래식과 뮤지컬, 연극, 개그가 어우러진.

 

산속음악회와 축제 등 문화콘텐츠가 가미되면서 계족산 황톳길은 대전의 최고 명물이 됐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 3위’(한국관광공사), ‘5월에 꼭 가봐야 할 명소’(한국관광공사), ‘여행 전문기자들이 뽑은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33’, ‘지방자치단체 e-Marketing Fair 여행 부분 대상’(G마켓) 등은 계족산의 위상을 증거 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일을 사업가가 했으니 그는 박수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세계 언론에도 잇따라 대서특필됐다. 세계 4대 뉴스통신사 중 하나인 AFP가 2008년 5월 맨발축제를 전 세계에 타전했고, 일본 NHK 등이 현장 스케치한 축제 영상을 주요 뉴스 시간에 내보냈다. 한국관광공사는 15개국 27개 해외지사를 통해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계족산 맨발축제를 소개했다. 무미건조한 대전이란 도시가 국내외에 이만큼 흥미진진한 도시로 각인된 적은 없었다. 2009년엔 아프리카 세이셸공화국 대통령이 황톳길을 맨발로 걸었고, 대전시장 답방 때 알다브라 육지거북, 일명 ‘세이셸 코끼리 거북’ 한 쌍을 선물했다. 이 세계적 희귀동물 한 쌍에는 무병(암컷 88세)과 장수(수컷 100세)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현재 대전동물원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계족산 황톳길이 대전의 명물이 되면서 덩달아 그도 바빠졌다. ‘역(逆) 창(創) 락(樂)’을 배우려는 대학과 공공기관, 기업 등이 그에게 특강을 청했다. 2007~2010년까지 64건이던 외부강의는 2011~2014년 225건으로 3.5배나 늘어났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전국을 누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계족산과 대전을 홍보한다. ‘뻔뻔한 클래식’의 여주인공이 정말 뻔뻔하게 이태리 가곡을 들려주면, 그가 등장해 경상도 억양으로 대전을 이야기한다. 대전이 익사이팅해 지는 순간이다.

 

공유가치 창출이 기업 활동의 최우선

 

그는 전경련 초청으로 대기업 회장들 앞에서도 강연을 했다. “요즘 반 기업정서를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기업이 많다. 계산기가 아닌 가슴으로 사업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이건산업 박영주 회장이 남긴 강평이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CEO란 사람이 황토 깔고 관리하는 데 몰두하니 처음엔 다들 미쳤다고 했다. 그 자신도 힘들고 불안했다. 그 때마다 ‘단숨에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자위했다. 그러면서 1년, 2년, 그는 사람들이 계족산과 맨발에 열광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이 벌인 일에 열광하는 대중을 보며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여배우를 모델로 쓰지 않아도, 판촉행사를 하지 않아도 산소 넣은 소주 ‘오투린’은 더 잘 팔렸다. 최근 수년 간 꾸준히 6~10%의 매출 신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사업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흔히들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이 중요하다고 한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하고 남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게 아니라, 기업 활동 자체를 사회적 가치 창출에 두고 동시에 이익도 취한다는 의미다. 그가 그렇게 한 기업인이다. 그는 소주회사의 최고경영자지만 원래 있던 계족산에 황톳길, 음악회, 축제 등 공공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해 제공했다. 소주 팔아 번 돈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있는 돈으로 그렇게 하면서 소주를 팔았다는 얘기다.

 

조웅래 식 가치관경영 ‘여(慮) 신(信) 공(共)’

 

발상의 전환이 창조가 되고, 그것이 대중의 즐거움과 공유가치기가 되기까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신뢰를 얻는 인내가 필요했다.

 

그는 뒤집어 생각함으로써 창조하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역(逆) 창(創) 락(樂)’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생각, 창조, 즐거움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을지, 대중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기 위해 쉼 없이 궁리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배려심이다.

 

 

배려하는 마음이 꾸준하면 신뢰를 얻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곧 제 풀에 꺾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계족산이 좋아서, 더 많은 사람이 올 때까지 오히려 더 생각하고 더 일을 벌였다. 행동에 변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의 진정성을 믿게 된 것이다.

 

맨발문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처음엔 신발 벗기를 모두가 꺼렸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게 됐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주니(慮) 신뢰가 쌓이고(信) 비로소 함께 하는(共) 문화가 형성된 셈이다. 발상의 전환이 창조가 되고, 그것이 대중의 즐거움과 공유가치기가 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여(慮) 신(信) 공(共)’, 조웅래 식 가치관경영이다.

Posted by Paul Félix

 

                                       '에코힐링'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조웅래 선양 회장.

 

어두침침한 실내조명. 벽에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고 응접실 한 구석에는 기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짧은 머리에 청바지, 흰색 와이셔츠 차림새의 사내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다. 흡사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했다.

 

조웅래(53). ‘에코힐링(Ecohealing)'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자연(ecology)과 치유(healing)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다. 요즘은 자연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 받는 ’에코힐링‘이란 말이 흔하게 쓰이지만 상업적으로 함부로 쓰면 법적 제재를 받는다. 조 회장이 지난 2007년 6월 상표로 등록해 놓은 상태다.

 

‘창업 영웅’이 지방소주회사 인수… 묘한 반전과 함께 지역사회 등장

 

 

건강과 휴식을 파는 그는 역설적이게도 술을 만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다. 한 때 ‘창업의 영웅’으로 불리던 그가 대전‧충남의 향토 소주 업체인 ㈜선양을 인수한 건 지난 2004년. 대기업에 밀려 텃밭을 다 내줄 위기에 처해 있던 지방의 소주회사 인수자가 벤처사업가라는 사실만으로 충격적이었다. 가치관의 혼돈이랄까 묘한 반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인 ㈜5425는 물론 가족을 모두 데리고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리고는 충청도 사람이 됐다. 5425에 근무하던 직원들도 덩달아 대전시민이 됐다. 뭔가 일을 꾸며도 단단히 꾸밀 사람으로 느껴졌다. ‘산소 넣은 소주’라는 기가 막힌 생각을 실천에 옮기더니 2년 후에는 자갈이 섞인 산길에 황토를 깔았다. 예상은 했지만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맨발로 뛰는 마사이마라톤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2010년부터는 맨발축제로 개념을 확장했다. 해발 423m의 평범한 계족산이 그의 아이디어 하나로 대전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다.

 

지난해 5월 15일 한국관광공사 이참 사장이 계족산을 찾았다. 그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차가운 진흙을 밟으니 자연의 에너지가 그대로 흡수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한 사람들과 정이 드니 기분이 좋아져서 절로 흥이 난다”고 했다. 그는 이를 “한국만의 매력인 기(氣), 흥(興), 정(情)의 에너지”라고 정의했다. 한국의 정취를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사장이 다녀간 후 계족산 맨발축제는 세계에 알려졌다. 관광공사가 4개 국어로 제작해 15개국 27개 해외지사에 비치한 홍보책자에 대한민국 대표축제 중 하나로 소개된 것. 이 책자는 국내 MICE산업(회의‧포상관광‧컨벤션‧전시회) 육성을 위해 제작됐다. 내세울만한 천혜의 자연환경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시작된 축제가 맨발축제다. 세상에 이런 축제가 또 있을까? 축제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대전에 있어선 더욱 그렇다.

 

이런 족적 때문인지 조웅래하면 ‘역발상(逆發想)’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거울에 사물이 역으로 비치듯 거꾸로 생각해 보는 걸 역발상이라고 한다. 역발상은 원래 사전에 없던 말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뒤집어 봤더니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정도가 될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창조(創造)로 이어진다. 그는 뒤집어 생각해보고 새로운 일을 꾸미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역(逆)으로부터 창(創)하는 게 그의 인생살이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역(逆)과 창(創)은 대중을 즐겁게(樂) 한다. 그래서 조웅래 식 경영은 역(逆)‧창(創)‧락(樂)으로 귀결된다.

 

뒤집어 생각하니(逆) 새로운 일이 비롯되고(創) 이로써 대중을 즐겁게(樂) 하리라

 

 

그는 1959년 경남 함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었던 데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대학진학은 꿈도 안 꿨다. 농사짓고 꼴을 베 소에게 먹이는 건 기본이었다.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러 리어카를 끌고 다녔고, 인분을 퍼 보리 짚과 섞어 퇴비도 만들었다. 그는 “공부를 못한다느니 잘하라느니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속을 받은 일이 없고, 좌충우돌로 살았던 게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고 했다.

 

머리가 좋은 편이었는지 대충하는 공부였지만 명문 마산고에 합격했다. 술 마시고 담배 피고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경북대 전자공학과에도 붙었다. 그는 “공부를 안 한 거지 못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78학번이니 시위가 끊이지 않을 때였다. 데모에 참여했다가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맞았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핑계로 자원입대했다. 백골부대에 배치됐는데 전공 덕분에 전화선을 설치하고 수리하는 가설병(架設兵)의 소임이 맡겨졌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삼성반도체와 LG정보통신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끝날지도 모를 그의 인생을 바꾼 건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이었다. 전화기가 다이얼식에서 버튼 식으로 바뀌었을 때였는데 마침 한국통신에서 유선망을 개방해줬다. ‘아이템만 있으면 망하지는 않겠다!’

 

당장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부속품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1992년 자본금 2천만 원으로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요즘말로 하면 ‘1인 창조기업’이다. 유선전화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사무실을 마련할 돈이 없어 아이의 침대 밑에 장비를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방에서 사람을 기다리다 100원을 넣고 띠 운세를 봤다. ‘전화로 운세를 볼 수 있다면…’.

 

그는 ‘8484(팔자팔자)’라는 번호에, 선풍적 인기를 끌던 중국 드라마 포청천,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의 남‧여 성우를 캐스팅했다. 배경으로 피리, 단소 소리를 넣어 점집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창업 1년 만에 1억 원을 벌었다. 대박이었다. 그 후 ARS 보드도 직접 만들었다. 국산 1호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술에 찌들어 살았다. ‘이러다간 폐인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음악 메시지 사업을 시작했다. 무선호출기, 이른바 ‘삐삐’가 보급돼 있던 시절이다. 삐삐 사서함에 음악을 저장해 놓으면 목소리와 멜로디가 함께 나오는 아이템이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도, 이메일도 없던 때였다. 크리스마스카드 대신 ‘700-5425’를 통해 캐럴송을 선물하는 광고를 했다. ‘사람과 사람사이’이라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음악으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한다는 의미였다. 상대방에게 음악으로 나를 표현하는 새로운 문화의 등장에 대중은 환호했다.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5425’는 국내 최대의 모바일콘텐츠 업체가 됐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기도 전에 ‘컬러링’의 개념을 개발한 게 그 원동력이다. 공격적인 ‘브랜드 마케팅’은 업계 난립으로 이른바 ‘700업체’가 하나 둘 쓰러지는 와중에서도 5425를 지탱시켜 줬다. IMF 외환위기 이후 연매출의 1.5배가 넘는 자금을 광고비로 쏟아 부었을 정도. 이 때문에 30~40대라면 누구나 ‘5425’를 기억하고 있다.

 

잘 나가는 IT기업이 많고 많은 제조업체 중 왜 주류회사를, 그것도 경영난에 허덕이던 지방소주회사를 합병했을까? 그는 2000년대 초반 무선인터넷 사업에 진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무선망 개방이 이뤄지지 않았다. 제조업으로 눈을 돌린 직접적인 이유다.

 

그는 “5425는 불특정 대중이 타깃이다. 소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걸 팔아봤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회사가 넘어갈 정도로 어려웠으니 역으로 생각하면 성장가능성이 많은 것 아니냐”고도 했다.

 

“산소 마시면 술 빨리 깨”… 하이힐 신은 女親 신발 벗어주고 맨발예찬가 돼

 

 

                              짧은 머리에 청바지, 흰색 남방 차림새가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했다.

 

그는 선양을 인수하자마자 산소소주를 개발했다. 당시 선양의 대표 브랜드는 은(銀)처리여과공법으로 만든 ‘새찬'이었다. 그가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포항심층수를 마셨더니 술이 빨리 깨더란다. 알아봤더니 산소가 30피피엠(ppm) 들어가 있었다. 그는 “산이나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면 덜 취하고 빨리 깬다. 산소를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 했다. ‘소주에 산소를 넣자’는 발상이었다.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일본에 특허를 낸 산소소주 ‘오투린(O2린)’은 그렇게 태어났다.

 

소주회사 선양이 에코힐링 기업으로 거듭난 사연도 재밌다. 그가 대전으로 이사 오고 대구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간혹 놀러왔다. 그 때마다 그는 도시락을 싸서 계족산 트래킹을 즐겼다. 2006년 4월 고교시절 자취할 때 친하게 지내던 여자친구 2명이 조 회장을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계족산에 갔는데, 하필이면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동행했던 남자친구와 운동화를 벗어주고 맨발로 걸었다.

 

자갈이 섞인 산길을 5시간이나 걸었더니 발이 성할 리 없었다. 그런데 몸 전체가 후끈거리고 잠도 푹 잤다. 이런 상태가 2~3일 동안 계속됐다. 조 회장은 널리 알려진 마라톤 마니아다. 42.195㎞ 풀코스를 40차례나 완주했다. 최근 기록은 경주벚꽃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30분 16초. 맨발의 효험을 알게 된 그는 이때부터 맨발로 뛰었다. 신발 신고 뛸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이런 걸 나 혼자 할 순 없지!’

 

지금은 조 회장 덕분에 맨발걷기가 유행처럼 됐지만 6년 전만 해도 정신 나갔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었다. 맨발로 걷기를 거리끼는 보다 근본적 이유는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이 문제만 해소하면 된다!’ 처음엔 마사토를 깔았다. 맨발걷기는 신발을 벗고 대지의 느낌을 받는 촉각이 중요하다. 거칠었다. 여기저기에서 황토를 공수해왔다. 느낌이 보드라우면서 편했다. 불그스름한 색깔은 따뜻하면서도 활기찬 기분이 들게 했다. 조 회장은 “이게 치유의 개념”이라고 했다.

 

그는 “마사이족은 육식을 주로 하는데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일반인의 3분의 1 수준이다. 하루에 20㎞ 정도를 걷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미지를 차용해 마사이마라톤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황토가 깔린 14.5㎞ 구간을 시간제한 없이 걷고 뛰었다. 숲길 사이사이에서는 연주가 이뤄졌다. 그동안 선양이 매년 전국에서 구해온 황토 2만여 톤을 쏟아 붓고 보수와 정비를 하면서 들어간 돈은 40억 원이나 된다.

 

천혜의 자연환경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대전 대표축제 만들어

 

 

                               조 회장은 널리 알려진 마라톤 마니아다. 42.195㎞ 풀코스를 무려 40차례나 완주했다.

 

대중이 즐거워하자 마사이마라톤은 맨발축제로 확대됐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 37개국 1000여 명의 외국인을 비롯해 1만 2000여 명이 다녀갔다. 참가비는 저소득 가정 및 다문화 가정 후원금으로 쓰인다. 10~20대는 참가비를 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4월부터 10월까지 주말마다 맨발 도장 찍기, 황토머드팩 체험 등 상시이벤트가 열린다.

 

2007년부터 월 1회 무료로 개최했던 숲속음악회는 올해부터 매주 토‧일요일 오후 4시 정기 상설무대로 운영된다. 선양 에코페라공연단의 ‘뻔뻔(fun fun)한 클래식’. 클래식과 뮤지컬, 연극, 개그가 한데 어우러져 3대가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지향하고 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좌우명이다. 그는 “제대로 미치려면 확신이 중요하다. 흥미가 있어야 미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사업하는 21년간 아침이 기다려질 때가 가장 좋았고 지금도 그렇다. 뭔가 설레고 할 게 많아야 아침이 기다려진다. 뭔가 미쳐있어야 할 게 많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맨발에 미쳐 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30분 택시를 타고 계족산에 간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고 걷는다. 그는 대중에게 함께 미치자고 한다. 그래서 황톳길 확산에 나서고 있다. 2009년 충남 아산 신정호를 시작으로 대전 둔산동 크로바아파트 단지, 대덕연구단지 한국연구재단, 천안 부엉공원 및 아산 용곡공원, 대전 갈마동 경성큰마을아파트 단지 등 도심 속에 황톳길을 조성했다.

 

그는 4년 연구개발 끝에 ‘맥키스(MACKISS)'라는 화이트 위스키를 출시했다. 도수가 40도가 아닌 21도다. '이지(easy) 칵테일’을 지향했다. “주스 같은 음료와 섞어 마시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주폭(酒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그의 발상에서 나온 술이다. 2009년 지경부가 대한민국 차세대 브랜드로 선정했고, 2012대전세계조리사대회 공식만찬 건배주로 사용됐다.

Posted by Paul Félix
점심 시간이 되면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손쉽게 생각나는 게 백반입니다. 정말 맛깔나게 잘 하는 백반집이 어디에 있을까? 대전 서구 만년동 KBS방송국 정문에서 바로 건너편을 보면 1층에 <연분홍해물탕>이 있고 그 2층에 <전주향기>라는 집이 있습니다.

이 집은 간판이름 답게 전주식 백반을 전문으로 합니다. 전북 전주가 고향인 주인이 직접 지리산 산나물과 강원도 산야초 등 각종 나물을 식탁에 올립니다.


저는 이런 나물반찬들을 볼 때마다 우리 조상들이 존경스러워집니다. 이런 나물들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그 향기를 느끼며 오감을 만족시키는 상차림을 만들어내다니요!

전주식백반이 반찬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이 집은 6천원 정식기본(향기정식)이 20찬입니다. 1만원짜리 향기스페셜을 시키면 기본정식 20찬에 소불고기와 홍탁, 돼지수육, 오리훈제로 이뤄진 홍탁사합이 나옵니다.

정말 푸짐하죠?


일단 음식을 주문하면 테이블 한켠에 따뜻한 보리차나 숭늉이 놓이고 이어 입맛을 돋우게 하는 고사리, 버섯, 다래순, 방풍나물, 토란, 뽕, 콩깍지 등 지리산 산나물과 민들레, 오가피 등 강원도 산야초가 한상 가득 나옵니다.


대표적인 나물들을 한컷한컷 사진에 담습니다.


향긋한 자연의 냄새가 코 깊숙히 닿을라치면 입에서는 달콤하면서 고소하고 쫄깃한 오묘한 맛이 즐거움을 줍니다. 여기에 짭짤한 젖갈과 삶은 묵은지, 잡채, 상치겉절이, 고추전, 계란찜, 청국장 등이 나옵니다. 어느 것 하나 그 맛에 모자람이 없네요.


콩나물국, 우거지국, 미역국 등 그날그날 바뀌어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국도 식욕을 돋우는 데 빠질 수 없습니다.


홍탁사합이 드디어 나옵니다. 반주 한 잔은 기본입니다. 오투린 1병을 시켜 두 잔 정도 마셔줍니다. 김치에 홍탁, 삽겹살을 싸먹는 홍탁삼합은 자주 먹어봤지만, 여기에 오리훈제를 곁들이는 홍탁사합은 첨 먹어봅니다.


오늘 점심은 아주 향기나면서도 푸짐하게 잘 먹었네요.^^

☎ 전주향기 (042)476-2600
Posted by Paul Félix
1973년 금관소주로 통합된 대전충남의 소주가 선양이란 이름으로 출범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주정할당제, 지역별 점유율 보장과 위헌판결 등을 거치며 향토민과 함께 했던 선양이 한 '벤처사업가'에게 매각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조웅래 회장의 선양 인수로 '에코힐링' 기업으로 거듭난 선양의 각종 홍보물. - 선양 홈페이지

선양 인수를 전격 단행, 회장에 취임한 사람은 뜻밖의 엔지니어 출신이었습니다. ㈜5425의 조웅래대표는 경남 함안의 시골에서 태어나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반도체와 LG정보통신에서 근무했습니다.

            조웅래 회장. - 선양 홈페이지

1992년 자본금 2000만원을 들고 교환기 1대로 1인 회사를 차리고 700 운세서비스와 퀴즈서비스를 시작했던 인물이죠. 남보다 앞선 시대 인식으로 1995년 전화신호와 음성을 컴퓨터가 인식하고 저장·출력할 수 있는 ARS보드를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뒤 이를 바탕으로 삐삐 인사말 사업에 뛰어들었지습니다.

5425를 한 때 국내 최대 모바일 콘텐츠 업체로 키운 것은 휴대전화였습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활성화되기 이전에 '통화연결음'을 개발한 것이 상상을 초월한 히트를 친 것이죠.

5425는 제2의 도전을 위해 대전에 그 터를 잡았습니다. 제조업에 욕심이 있던 조 회장은 선양을 인수하고 5425의 본사와 자신의 가정까지 모두 대전으로 옮겨왔습니다.

조 회장은 마라톤 풀코스(42.195㎞)를 수십차례나 완주했을 정도로 마라톤 마니아이기도 합니다.

마라톤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에코힐링(Eco Healing)'이란 새로운 마케팅 기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양이 매년 개최하는 계족산 맨발걷기.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 선양 홈페이지
                 가수 인순이와 조웅래회장이 계족산에서 맨달걷기를 하고 있다. - 선양 홈페이지
충남 태안에서 열리는 샌드비스타마라톤 대회 - 선양 홈페이지

계족산 피톤치드마라톤, 태안 샌드비스타마라톤, 세이셸(Seychelles)이란 인도양의 섬나라에서 선양이 주최하는 에코힐링 마라톤도 이런 마케팅의 일환입니다.

인도양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유명한 세이셸공화국의 제임스 미쳴 대통령도 계족산을 방문해 박성효 당시 대전시장, 조웅래 회장과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 선양 홈페이지

선양은 에코힐링 마케팅과 함께 '린 소주' 시대의 개막을 알립니다.

산소가 3배 많아 30분 먼저 깨는 소주를 컨셉트로 한 '맑은 린'이 바로 그 것. 맑은 린 출시와 함께 선양은 유명배우를 광고모델로 등장시킵니다. S라인의 대명사 한채영.

                                  한채영을 등장시킨 맑은 린 광고 - 네이버 이미지 검색

맑은린은 다시 오투린(O2린)으로 리뉴얼되죠. 산소가 3배가 많아 30분 먼저 깬다는 카피를 두고 경쟁사와 갈등도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오투린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선양은 '보리소주 맥'과 최초의 여성소주인 '버지니아'를 잇따라 출시합니다.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술'과 '건강'이 '에코힐링'이란 마케팅과 결합해 소주시장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조웅래식 에코힐링과 소주의 결합, 앞으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저는 오투린을 즐겨마시는 한 애주가임을 밝힙니다.


Posted by Paul Félix
소주회사들의 1차 통폐합에 이어 1개 도에 1개 소주만이 허용되는 이른바 '자도주(自道酒)' 시대가 정착된 것은 1976년입니다. '1도 1사' 제도가 확립되면서 정부는 수도권 주조회사에 비해 경영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방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주 50% 판매제도'를 함께 시행했습니다.

 선양소주 옛날사진 모음 - 네이버 이미지 검색

비록 '강제성'에 근거하고 있었지만, '자도주' 제도 아래에서 선양은 안정적인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태평성대는 88서울올림픽까지 계속됐지요.

서울올림픽은 소주회사들로 하여금 소주의 고급화를 추진케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선양도 이 같은 추세에 맞춰 대거 연구인력을 보강, '관광 소주'를 출시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기반을 다진 기술력은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EXPO)를 기화로 선양을 지역 대표 브랜드로 발돋움케 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88서울 올림픽과 93 대전엑스포를 겨냥해 선양이 야심차게 출시한 관광소주 - 네이버 검색 이미지

1989년 '자도주' 제도가 폐지되면서 '지방주 50% 판매제도'도 지난 90년 40%, 91년 30%로 잇따라 축소된 데 이어, 92년에는 사실상 소주시장의 자유경쟁 체제가 본격화됐습니다.

그러나 '엑스포 소주'가 지역 고급시장을 완전히 석권, 선양이 '향토 소주'에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음을 대내외에 입증해 보일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엑스포 소주는 '지방주 50% 점유율 보장 제도' 폐지에도 불구하고 선양을 명실상부한 지역소주로 자리매김시킨 인기상품이었다. - 네이버 이미지검색

대전세계박람회 지역 공식소주이기도 했던 엑스포 소주는 국내 소주회사 최초로 어깨에 주름이 잡힌 독특한 병으로 특히 인기를 끌었지요. 93년에는 또 선양이 증류식 소주 제조 면허를 취득하고 오동공장(증류식)을 준공, 희석식-증류식 양대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오동공장 준공 - 충청투데이 DB

1995년에는 선양의 최대 히트상품인 '선양그린'이 출시됐고, 이와 동시에 최초의 22도주인 '투투'가 시장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젊은층과 여성층을 겨냥한 이 파격적인 저도주(低度酒)는 종전 25도 시장의 완고한 벽을 뚫지는 못했습니다.

                     25도가 일상적인 상황에서 22도의 파격적 저도주로 출시됐던 '투투'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저도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선양그린은 지난 87년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창당과 그 이듬해 총선 압승 등 지역민심의 '정치적 결집'에 힘입어 폭발적인 점유율을 기록했습니다. 88년 선양의 점유율은 대전·충남을 통틀어 70%를 넘기도 했지요.

그러나 지방주 50% 판매제도를 골자로 한 '주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95년 다시 '자도주'가 되살아났습니다. 중간 도매상들이 다시 의무적으로 자도주 50%를 시장에서 소비해야만 했던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자도주'는 안정적인 점유율을 보장해 주었으나 규모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방소주들은 영업·마케팅의 부재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선양과 충남권 일부 중간 도매상들간에는 갈등의 조짐까지 있었습니다. 중간상의 가족화는 주류판매의 기본인데도 '자도주' 제도가 이를 자각하지 못하게 한 셈이었죠.

갈등의 불씨가 타오른 것은 1996년. 천안의 한 중간도매상이 '판매율을 강제하는 것은 자유경쟁 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을 냈습니다. 이는 결국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이어져 '자도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도매상들이 선양을 공급하지 않으면서 천안, 아산, 당진 등에서 선양의 점유율은 계속 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양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난 98년 선양은 국내 첫 23도 소주인 '선양그린'을 출시했습니다. 진로나 경월 등 대기업들도 23도 소주 출시가 1년여나 늦었던 것을 감안하면 소주의 판도변화를 선양이 주도한 셈이었죠.

     1995년 출시된 선양의 최대 히트상품 '선양그린'. 국내 첫 23도주로 기록되면서 소주시장의 판도변화를 이끌었던 상품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여기에 97년 대선을 앞두고 JP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연합한 이른바 'DJP 연합'을 구축했습니다. 이에 앞서 3당 합당으로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권력을 분할했던 JP가 소위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자 충청권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이 다시 '충청권 핫바지론'을 들먹거렸습니다.

소주소비가 정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다보니 향토소주도 덩달아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자민련의 상징이 녹색인 것도 '선양그린'에는 호재였지요.

이 때문에 선양이 국내 처음으로 소주병의 컬러를 '블루스카이'에서 녹색으로 바꾼 것을 놓고 정치를 이용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지난 94년 선양은 경월그린에 한 달 앞서 녹색병을 출시했습니다. 이는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어느 날 병공장에서 하자품(녹색병)이 무더기로 납품된 일이 있었습니다. 공급물량을 축소할 수 없었던 선양은 고심 끝에 박스당 1∼2병씩 녹색병을 끼워 넣었고, 소비자들은 이를 전략상품으로 오해했습니다. 업소에서는 이 '전략상품'을 아껴뒀다 단골고객에게만 건넸고, 중간상들도 단골 거래처에 녹색병을 덤으로 '서비스'했습니다. '불량품'이 최대 '히트상품'이 된 것이죠.

선양은 정치적 환경과 선양그린의 예상치 못한 대히트로 지난 98∼99년 대전 80%, 충남 65%의 점유율을 기록했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점유율이 5%가 넘었을 정도였죠.

그러나 선양의 최대 위기는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2001년 9월 '주류구매 전용카드'가 전격적으로 도입됐습니다. 외상으로 물량을 공급받았던 중간상들에게 '현금거래'가 시작된 겁니다. 제도 도입을 앞두고 중간상들은 외상으로 물량을 받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고, 선양은 설비부족으로 이 물량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대전·충남권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던 진로가 이 시기에 지역 소주시장을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선양은 앉아서 '텃밭'을 내주고만 꼴이 됐죠.

여기에 3년여를 끌어온 경월그린과의 '그린' 상표권 분쟁으로 양사 모두 '그린'이란 상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선양은 새 브랜드인 '선양새찬'을 급작스럽게 시장에 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경월그린과의 상표권 분쟁으로 양사모두가 '그린'을 상표로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등장한 '선양새찬' - 선양 홈페이지


 *다음편은 <대전사랑 오투린 이야기(3) - 銀소주 특허 옛명성 회복 도전장>이 이어집니다.
Posted by Paul Félix
우리나라 지방소주 지면광고. 왼쪽부터 대전충남의 오투린, 경남의 좋은데이, 화이트, 광주전남의 잎새주 <네이버 검색이미지>

우리나라에는 각 광역권별로 소주회사가 하나씩 있습니다.

경남에 가면 무학소주라는 주류업체에서 생산하는 '화이트소주'가 있고, 대구경북에는 금복주의 '참소주', 전남에는 보해양조의 '잎새주', 전북은 보배의 '하이트소주', 부산은 대선주조의 '시원소주', 제주에는 한라산소주의 '순' 등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대전충남에는대전충남에는 선양의 '오투린'이 있습니다.

수도권에서는 진로의 '참이슬'과 두산의 '처음처럼'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죠. 영호남에만 가면 그 지역의 소주가 절대적인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남은 천안아산권과 서해안권은 '참이슬'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오투린'은 대전권에서만 선전을 하고 있는 느낌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선양 '오투린'을 오랫동안 마셔왔습니다. 그래서 선양소주에 대한 관심도 큽니다. 그래서 '지역사랑=대전소주'란 관점에서 <오투린 이야기>를 시리즈로 마련보고자합니다.

오늘은 <대전사랑 소주 이야기>의 1탄, 선양소주의 탄생에 얽인 실화입니다.

                    <선양소주 가수원공장 전경 - 충청투데이 DB>
 
1973년 5월 중구 선화동 285-1번지 옛 대전지방국세청장실. 조경환 당시 지방국세청장이 충남·북 소주업체 33개 대표들과 간담회 자리를 마련하고 정부의 소주업체 통폐합 방침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조 청장이 설명한 소주업체 통폐합 방침은 간단했죠.

농민부터 대통령까지 마시는 '국민주'인 소주를 고급화하자는 게 골자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질에 대한 검증 절차 없이 이른바 '막소주 공장'에서 소주가 만들어지다 보니 위생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일정 규모로 지역별 소주공장들을 하나로 합쳐 놓으면 위생관리도 쉬울 뿐 아니라 세금을 걷기도 한결 손쉬워질테죠.

"전국적으로 소규모 소주업체가 난립하고 있었어요. 시·군 단위로 최소한 1개씩은 있었으니까. 충남·북에 33개가 있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건 아니었지. 어쨌든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김상훈 전 선양주조 대표이사가 밝힌 통폐합 당시의 회고입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정부가 밀어붙이는 대로 충남·북 소주회사 33개가 1973년 8월 금관주조㈜를 설립하고 하나로 합쳐졌죠.

소주회사들을 통폐합하면서 정부는 소유와 경영 분리 원칙을 표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 청장이 당시 충남개발위원회(현재 대전개발위원회 전신) 박선규 회장(당시 박외과병원 원장)을 찾았습니다. 충청권 소주회사가 탄생했으니 충청권에서 영향력이 있는 단체의 장이 초대 사장을 맡아 주면 좋겠다는 취지였죠.

이에 박 회장은 김종렬 충남개발위원회 부회장을 추천해 그가 초대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이 시기에 금관주조는 가수원에 신축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공장이 완공될 때까지 충남 논산의 임시공장을 활용했습니다.

진로와 금복주 등이 충청권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공백기를 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대전에 출하장을 두고 임시공장을 가동해 전국에 판매를 시작했던 겁니다.

                                                  충청권 첫 통합소주로 출시된 금관소주

충청권 첫 통합 소주가 출범을 하기는 했지만 주주가 워낙 여럿이다 보니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었죠. 몇 개월 새 자본잠식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당시 이종섭 2대 사장과 김상훈 전무, 이인석 상무 등이 나머지 주주들에게 투자원금을 돌려주고 금관주조를 3인체제로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1974년 5월 가수원 공장 준공과 함께 금관주조는 상호를 선양(鮮洋)으로 변경했습니다. 선양주조의 본격적인 역사가 출발하는 순간이었죠.

"서울 '김용수작명소'로 갔더니 '선양'과 '정로(定露)' 두 가지를 적어 주더군요. 그래서 직원들과 상의했더니 선양이 좋다고 해요. 선양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즐겨 마시는 소주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김용수 선생 말도 있고 해서 저도 선양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김상훈 전 사장의 설명입니다.

                            선양주조 창업멤버로 지난 1988년~1995년 대표이사를 역임한 김상훈 전 사장(충청투데이 DB)

이 때만 해도 소주회사들은 소주 원료인 '주정'을 일정한 양 이하로만 배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주정배정제도'라고 하지요.

당시 선양은 해마다 2.6∼3%의 주정을 배정받았습니다. 주정에 제한을 뒀기 때문에 더 만들어 팔고 싶어도 못파는 시대였습니다. 또 배정받은 주정을 다 소모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는 전년도보다 주정배정량이 축소되기 때문에 소주회사들은 배정된 주정을 다 소모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640㎖, 1800㎖ 등 유난히 큰 용량의 소주가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정된 주정을 모조리 소모하기 위한 선택 '댓병' - 네이버 검색

이처럼 주정배정제도는 회사의 성장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선양의 경우엔 배정된 주정으로 지역 시장을 지키기도 버거웠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지금의 '1도 1소주'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6년 이른바 '자도주(自道酒)' 시대가 개막된 것이죠.

                                                1973년 출시된 소주(燒酎) - 선양홈페이지

당시 충남에는 선양이 이미 1도 1사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전북지역에는 소주회사가 통폐합 과정을 거쳤음에도 3개사나 있었습니다. 백화소주와 오성소주가 하나로 합쳐져 지금의 보배가 됐죠. 정부도 통합회사에게는 그만큼 주정을 확대해 줘 일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때 보배와 함께 전북지역에 남아 있던 전북소주가 다시 충청권 첫 통합 소주 회사인 선양주조에 흡수·통합하게 됩니다. 두 회사 모두 기존의 주정으로는 시장 확장이 불가능한 데다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죠.

선양이 전북을 흡수·통합하면서 주정배정량도 크게 늘어나 지역시장을 80%까지 점유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습니다.

76년 '1도 1사'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정부에서는 '자도주 50%'를 강제조항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충남에서는 선양소주의 점유율이 50% 이하로 내려갈 수 없게 된 것이죠.

이에 따라 선양은 규모의 상대적 영세성에도 불구하고 견실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별도의 마케팅이나 영업활동 없이도 지역 시장을 기반으로 얼마든지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는 지방 소주회사들에게는 향후 '영업'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지역민들에게 '선양=지역소주'라는 인식이 각인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다음은 <대전사랑 오투린 이야기(2) - 하자로 만든 녹색병 전략상품 변신>


Posted by Paul Félix
1973년 금관소주로 통합된 대전충남의 소주가 선양이란 이름으로 출범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주정할당제, 지역별 점유율 보장과 위헌판결 등을 거치며 향토민과 함께 했던 선양이 한 '벤처사업가'에게 매각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조웅래 회장의 선양 인수로 '에코힐링' 기업으로 거듭난 선양의 각종 홍보물. - 선양 홈페이지

선양 인수를 전격 단행, 회장에 취임한 사람은 뜻밖의 엔지니어 출신이었습니다. ㈜5425의 조웅래대표는 경남 함안의 시골에서 태어나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반도체와 LG정보통신에서 근무했습니다.

            조웅래 회장. - 선양 홈페이지

1992년 자본금 2000만원을 들고 교환기 1대로 1인 회사를 차리고 700 운세서비스와 퀴즈서비스를 시작했던 인물이죠. 남보다 앞선 시대 인식으로 1995년 전화신호와 음성을 컴퓨터가 인식하고 저장·출력할 수 있는 ARS보드를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뒤 이를 바탕으로 삐삐 인사말 사업에 뛰어들었지습니다.

5425를 한 때 국내 최대 모바일 콘텐츠 업체로 키운 것은 휴대전화였습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활성화되기 이전에 '통화연결음'을 개발한 것이 상상을 초월한 히트를 친 것이죠.

5425는 제2의 도전을 위해 대전에 그 터를 잡았습니다. 제조업에 욕심이 있던 조 회장은 선양을 인수하고 5425의 본사와 자신의 가정까지 모두 대전으로 옮겨왔습니다.

조 회장은 마라톤 풀코스(42.195㎞)를 수십차례나 완주했을 정도로 마라톤 마니아이기도 합니다.

마라톤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에코힐링(Eco Healing)'이란 새로운 마케팅 기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양이 매년 개최하는 계족산 맨발걷기.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 선양 홈페이지
                 가수 인순이와 조웅래회장이 계족산에서 맨달걷기를 하고 있다. - 선양 홈페이지
충남 태안에서 열리는 샌드비스타마라톤 대회 - 선양 홈페이지

계족산 피톤치드마라톤, 태안 샌드비스타마라톤, 세이셸(Seychelles)이란 인도양의 섬나라에서 선양이 주최하는 에코힐링 마라톤도 이런 마케팅의 일환입니다.

인도양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유명한 세이셸공화국의 제임스 미쳴 대통령도 계족산을 방문해 박성효 당시 대전시장, 조웅래 회장과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 선양 홈페이지

선양은 에코힐링 마케팅과 함께 '린 소주' 시대의 개막을 알립니다.

산소가 3배 많아 30분 먼저 깨는 소주를 컨셉트로 한 '맑은 린'이 바로 그 것. 맑은 린 출시와 함께 선양은 유명배우를 광고모델로 등장시킵니다. S라인의 대명사 한채영.

                                  한채영을 등장시킨 맑은 린 광고 - 네이버 이미지 검색

맑은린은 다시 오투린(O2린)으로 리뉴얼되죠. 산소가 3배가 많아 30분 먼저 깬다는 카피를 두고 경쟁사와 갈등도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오투린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선양은 '보리소주 맥'과 최초의 여성소주인 '버지니아'를 잇따라 출시합니다.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술'과 '건강'이 '에코힐링'이란 마케팅과 결합해 소주시장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조웅래식 에코힐링과 소주의 결합, 앞으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저는 오투린을 선양소주로 시작해서 선양그린, 선양새찬, 맑은 린에 이어 오투린을 즐겨마시는 한 애주가임을 밝힙니다.

Posted by Paul Fé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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