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지극히 현명한 성찰 '히어애프터(Hereafter)'

시대의 트랜드가 1세기가 아니라 10년, 아니 더 단축되고 있는 초정보화사회. 종교나 철학, 명상은 거리가 멀어보이는 그런 시대지만 영화들은 그런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Hereafter)>가 그런 영화입니다.

<히어애프터>는 죽음을 보는 남자, 죽음을 겪은 여자, 죽음과 함께 사는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성찰하는 영화입니다.


조지(맷 데이먼)는 평범해 보이지만 특별한 능력,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가 '초능력'이라 부르는 능력을 가진 남자입니다. 다른 사람과 손을 잡으면 그 사람과 가장 관계가 있는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되고,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세실 드 프랑스)는 프랑스 뗄레비지옹의 유명한 앵커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애인(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PD)과 바캉스를 떠났다가 쓰나미를 만나 죽음의 세계를 다녀오는 특별한 경험을 했지요.


마커스는 쌍동이 형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채 그의 영혼을 찾아 헤매입니다. 쌍동이 형의 죽음을 살고 있는 소년입니다.

영화는 서로 다른 이 세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각각 담아냅니다. 세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죠. 조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리는 프랑스 파리, 마커스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셋이 런던에서 조우하는 것으로 영화는 한 편의 영화가 됩니다.

영화 <히어애프터(Hereafter)>는 말 그대로 여기가 아닌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여기(here)에 엄연히 존재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히어애프터>는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색, 죽음에 대한 성찰로 가득 채워진 영화입니다.

죽음은 종교적인 주제일 수 있고, 철학적일 수도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걸 떠나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아마도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이스트우드적인 죽음의 성찰이 있습니다.


리딩(reading), 즉 죽은 영혼을 보고 그 영혼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란 게 사실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지는 자신의 리딩 능력을 '축복'이라며 비즈니스로 연결시키려는 형 빌리와 달리 '저주'로 여기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걸 과대망상의 하나로 봐야하는지, 아니면 있을 수 있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능력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나의 삶과 깊게 관계되어 있는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내 삶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영화에서 이 '리딩'의 능력을 관객으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건 아무래도 마리인 듯 합니다. 마리는 죽은자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무중력의 세계를 경험했고, 닥터 루소 여사를 만나 확신을 하게 되거든요.


우연의 일치겠지만 마리가 그런 확신을 갖게 됐을 때, 조지는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자신이 평소 열렬히 좋아하는 찰스 디킨즈의 생가 등을 방문하기 위해 런던으로 갑니다. 런던 북페어에서 조지는 소년 마커스를 만나게 됩니다.

조지는 마커스의 형 제이슨의 영혼을 리딩하면서 마커스에게 "너의 안에 제이슨이 있다. 너와 제이슨은 하나"라고 말해줍니다. 소년 마커스가 구원을 받는 장면이죠.


그리고 마리와의 만남.

자신만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그런 능력에 대한 책의 저자인 마리를 런던북페어에서 만난 건 어찌보면 필연입니다.


소년 마커스가 조지에게 "아저씨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부르는 마리와의 만남을 통해 조지는 자신만의 능력이 '저주'가 아님을 확신하게 되죠. 마리도 자신이 쓰나미로부터 잠깐 경험했던 환영이 환영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구요.

죽음을 보고, 죽음을 겪었고, 죽음을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서로서로를 통해 구원에 이릅니다.

<히어애프터>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리딩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도, 무중력의 죽음의 세계, 즉 '히어애프터'가 실재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영화도 아닙니다. 단지 그런 방편을 통해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삶의 연속일 뿐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큰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나고, 태어나면서 어떤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태어남도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살다가 죽습니다. 그 죽음도 선택적인 일은 아니죠.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스토아 철학자, 즉 현자들은 그래서 '현명한 선택', 그리스어로 '헤레시스'를 강조합니다. 영어사전에 '이단'이라고 해석되어지는 헤레시스는 '태어나서 살다 죽는' 그런 삶에서 특별한 선택을 강조하는 것이죠.

죽음을 삶의 일부로 여기는 그런 깨달음이 있을 때에만 '헤레시스'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히어애프터>를 보고 나니 쥴리아 로버츠 주연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가 자연스럽게 연상됐습니다. 두 편의 영화가 '헤레시스'의 교훈을 깨닫게 해 줄 것 같거든요.
  • BlogIcon 지성의 전당 at 2018.10.07 20:01 신고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죽음이라는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 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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