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eeling & Talking

히스테리적 망상의 극치를 보여준 '블랙스완(Black Swan)'

장기 상영 덕에 관람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블랙스완(Black Swan)>은 히스테리적 망상의 극치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연출자인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니나 세이어스(나탈리 포트만)의 히스테리적 망상을 놀라울 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니나의 망상에는 누군지 모를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관객들을 섬뜩하게 만들 정도의 여인은 유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여인은 니나 자신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니나의 대역을 맡게 된 경쟁자 릴리(밀라 쿠니스)로 구체화되기도 합니다.


먼저 니나의 방을 보면 인형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화가(?)인 어머니의 방에는 소녀의 초상들로 가득합니다. 니나를 항상 "예쁜 소녀"라고 부르죠. "예쁜 소녀", 그렇습니다. 니나는 항상 예쁜 소녀입니다. 신체적으로 성인이 다 된 여인의 몸이지만 그녀는 소녀이어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히스테리는, 히스테리라는 그 단어의 라틴어 어원  'hustera'가 자궁을 뜻하는 것처럼 성적인 억압이 가해질 때 발생합니다. 우리말에 '노처녀 히스테리'란 표현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뉴욕 발레단의 총연출자 토마스 르로이(뱅상 카셀)도 니나에게 남성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성'을 요구합니다. 토마스는 니나를 키스하고, 도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니나에게 그런 여성성을 갖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토마스로부터 키스를 받고, 그의 입술을 깨물고 난 후 뜻밖에 백조와 흑조의 1인 2역을 맡아야 하는 'Swan Queen'에 캐스팅됐을 때 그녀의 망상은 거울에 루즈로 그려진 'W.H.O.R.E.'(창녀)를 그려넣습니다.

이는 성적욕망에 대한 니나의 저항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 니나의 망상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여인, 도발적이고 섹시하기까지 한 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나의 망상에는 그녀를 바라보는 유령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니나가 아버지가 없는 가정,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쁜 소녀'이어야 하는 니나도 부재하는 아버지를 갈망했던 여자 아이였을 테고, 니나의 망상에 등장하는 '유령'은 바로 아버지를 욕망하는 니나의 분신일 터입니다. 여기서 니나가 망상으로 만들어내는 유령은 아버지를 갈망하는 어머니의 경쟁자 뿐입니다. 예쁜 소녀일 수밖에 없는 니나가 아버지를 욕망하는 자신의 유령을, 즉 어머니의 경쟁자 혹은 어머니에 동일시된 그런 유령을 망상으로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심지어 니나는 뉴욕발레단의 토마스를 욕망하는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나는 당신을 욕망할 자격이 있는 여인이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니나의 망상은 신입배우 릴리의 등장으로 점점 정신분열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릴리가 칵테일에 탄 엑스터시를 마시기도 했지만 그녀는 망상 속에서 릴리와 뜨거운(?) 밤을 보냅니다. 자신의 몸을 만지면서 성적충동에 빠지기도 합니다. 니나의 망상에서 경쟁자가 어머니에서 릴리로 바뀌고 있는 것이죠.


니나가 뉴욕발레단의 전직 'Queen'이었던 베스 메킨타이어(위노나 라이더)의 화장품 등을 분장실에서 훔쳤던 걸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니나 자신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토마스는 바로 니나의 망상에서 유령이 욕망하는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니나가 망상에서 릴리와 동성연애 행각을 벌인 것도 릴리가 토마스를 사이에 둔 경쟁자(어머니의 상)가 아니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연출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뉴욕발레단이 니나를 새로운 'Swan Queen'으로서 '백조의 호수'를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날이 밝기 전 날, 니나는 토마스와 릴리의 격렬한 섹스신을 망상으로 연출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니나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생활을 엿본 소녀의, 어머니를 경쟁자로 여기는 '예쁜 소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백조를 연기하다 추락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 니나는 자신의 분장실에서 대역으로 나가겠다며 릴리가 흑조로 분장하는 망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는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깨진 거울 조각으로 릴리를 힘차게 찌릅니다.


경쟁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흑조' 니나는 마지막 힘찬 몸짓, 격정적이며 세상의 모든 남성을 유혹할 것같은 몸짓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습니다. 니나는 더 이상 '예쁜 소녀'가 아닙니다. 토마스가 원했던, '스완 퀸'이 된 것이죠.


그리고 니나는 망상을 조작하는 걸 멈춥니다. 자신이 깨진 거울 조각으로 힘차게 찔렀던 건 릴리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던 걸 깨닫게 된 순간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은 섬뜩할 정도로 히스테리적 망상을 잘 보여준 영화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