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ire sans dormir

대전사랑 오투린 이야기(1) ... 선양소주의 탄생

우리나라 지방소주 지면광고. 왼쪽부터 대전충남의 오투린, 경남의 좋은데이, 화이트, 광주전남의 잎새주 <네이버 검색이미지>

우리나라에는 각 광역권별로 소주회사가 하나씩 있습니다.

경남에 가면 무학소주라는 주류업체에서 생산하는 '화이트소주'가 있고, 대구경북에는 금복주의 '참소주', 전남에는 보해양조의 '잎새주', 전북은 보배의 '하이트소주', 부산은 대선주조의 '시원소주', 제주에는 한라산소주의 '순' 등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대전충남에는대전충남에는 선양의 '오투린'이 있습니다.

수도권에서는 진로의 '참이슬'과 두산의 '처음처럼'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죠. 영호남에만 가면 그 지역의 소주가 절대적인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남은 천안아산권과 서해안권은 '참이슬'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오투린'은 대전권에서만 선전을 하고 있는 느낌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선양 '오투린'을 오랫동안 마셔왔습니다. 그래서 선양소주에 대한 관심도 큽니다. 그래서 '지역사랑=대전소주'란 관점에서 <오투린 이야기>를 시리즈로 마련보고자합니다.

오늘은 <대전사랑 소주 이야기>의 1탄, 선양소주의 탄생에 얽인 실화입니다.

                    <선양소주 가수원공장 전경 - 충청투데이 DB>
 
1973년 5월 중구 선화동 285-1번지 옛 대전지방국세청장실. 조경환 당시 지방국세청장이 충남·북 소주업체 33개 대표들과 간담회 자리를 마련하고 정부의 소주업체 통폐합 방침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조 청장이 설명한 소주업체 통폐합 방침은 간단했죠.

농민부터 대통령까지 마시는 '국민주'인 소주를 고급화하자는 게 골자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질에 대한 검증 절차 없이 이른바 '막소주 공장'에서 소주가 만들어지다 보니 위생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일정 규모로 지역별 소주공장들을 하나로 합쳐 놓으면 위생관리도 쉬울 뿐 아니라 세금을 걷기도 한결 손쉬워질테죠.

"전국적으로 소규모 소주업체가 난립하고 있었어요. 시·군 단위로 최소한 1개씩은 있었으니까. 충남·북에 33개가 있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건 아니었지. 어쨌든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김상훈 전 선양주조 대표이사가 밝힌 통폐합 당시의 회고입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정부가 밀어붙이는 대로 충남·북 소주회사 33개가 1973년 8월 금관주조㈜를 설립하고 하나로 합쳐졌죠.

소주회사들을 통폐합하면서 정부는 소유와 경영 분리 원칙을 표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 청장이 당시 충남개발위원회(현재 대전개발위원회 전신) 박선규 회장(당시 박외과병원 원장)을 찾았습니다. 충청권 소주회사가 탄생했으니 충청권에서 영향력이 있는 단체의 장이 초대 사장을 맡아 주면 좋겠다는 취지였죠.

이에 박 회장은 김종렬 충남개발위원회 부회장을 추천해 그가 초대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이 시기에 금관주조는 가수원에 신축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공장이 완공될 때까지 충남 논산의 임시공장을 활용했습니다.

진로와 금복주 등이 충청권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공백기를 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대전에 출하장을 두고 임시공장을 가동해 전국에 판매를 시작했던 겁니다.

                                                  충청권 첫 통합소주로 출시된 금관소주

충청권 첫 통합 소주가 출범을 하기는 했지만 주주가 워낙 여럿이다 보니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었죠. 몇 개월 새 자본잠식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당시 이종섭 2대 사장과 김상훈 전무, 이인석 상무 등이 나머지 주주들에게 투자원금을 돌려주고 금관주조를 3인체제로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1974년 5월 가수원 공장 준공과 함께 금관주조는 상호를 선양(鮮洋)으로 변경했습니다. 선양주조의 본격적인 역사가 출발하는 순간이었죠.

"서울 '김용수작명소'로 갔더니 '선양'과 '정로(定露)' 두 가지를 적어 주더군요. 그래서 직원들과 상의했더니 선양이 좋다고 해요. 선양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즐겨 마시는 소주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김용수 선생 말도 있고 해서 저도 선양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김상훈 전 사장의 설명입니다.

                            선양주조 창업멤버로 지난 1988년~1995년 대표이사를 역임한 김상훈 전 사장(충청투데이 DB)

이 때만 해도 소주회사들은 소주 원료인 '주정'을 일정한 양 이하로만 배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주정배정제도'라고 하지요.

당시 선양은 해마다 2.6∼3%의 주정을 배정받았습니다. 주정에 제한을 뒀기 때문에 더 만들어 팔고 싶어도 못파는 시대였습니다. 또 배정받은 주정을 다 소모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는 전년도보다 주정배정량이 축소되기 때문에 소주회사들은 배정된 주정을 다 소모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640㎖, 1800㎖ 등 유난히 큰 용량의 소주가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정된 주정을 모조리 소모하기 위한 선택 '댓병' - 네이버 검색

이처럼 주정배정제도는 회사의 성장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선양의 경우엔 배정된 주정으로 지역 시장을 지키기도 버거웠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지금의 '1도 1소주'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6년 이른바 '자도주(自道酒)' 시대가 개막된 것이죠.

                                                1973년 출시된 소주(燒酎) - 선양홈페이지

당시 충남에는 선양이 이미 1도 1사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전북지역에는 소주회사가 통폐합 과정을 거쳤음에도 3개사나 있었습니다. 백화소주와 오성소주가 하나로 합쳐져 지금의 보배가 됐죠. 정부도 통합회사에게는 그만큼 주정을 확대해 줘 일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때 보배와 함께 전북지역에 남아 있던 전북소주가 다시 충청권 첫 통합 소주 회사인 선양주조에 흡수·통합하게 됩니다. 두 회사 모두 기존의 주정으로는 시장 확장이 불가능한 데다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죠.

선양이 전북을 흡수·통합하면서 주정배정량도 크게 늘어나 지역시장을 80%까지 점유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습니다.

76년 '1도 1사'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정부에서는 '자도주 50%'를 강제조항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충남에서는 선양소주의 점유율이 50% 이하로 내려갈 수 없게 된 것이죠.

이에 따라 선양은 규모의 상대적 영세성에도 불구하고 견실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별도의 마케팅이나 영업활동 없이도 지역 시장을 기반으로 얼마든지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는 지방 소주회사들에게는 향후 '영업'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지역민들에게 '선양=지역소주'라는 인식이 각인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다음은 <대전사랑 오투린 이야기(2) - 하자로 만든 녹색병 전략상품 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