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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 sans dormir

대전사랑 오투린 이야기(2)...'하자'로 만든 녹색병 전략상품 변신

소주회사들의 1차 통폐합에 이어 1개 도에 1개 소주만이 허용되는 이른바 '자도주(自道酒)' 시대가 정착된 것은 1976년입니다. '1도 1사' 제도가 확립되면서 정부는 수도권 주조회사에 비해 경영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방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주 50% 판매제도'를 함께 시행했습니다.

 선양소주 옛날사진 모음 - 네이버 이미지 검색

비록 '강제성'에 근거하고 있었지만, '자도주' 제도 아래에서 선양은 안정적인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태평성대는 88서울올림픽까지 계속됐지요.

서울올림픽은 소주회사들로 하여금 소주의 고급화를 추진케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선양도 이 같은 추세에 맞춰 대거 연구인력을 보강, '관광 소주'를 출시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기반을 다진 기술력은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EXPO)를 기화로 선양을 지역 대표 브랜드로 발돋움케 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88서울 올림픽과 93 대전엑스포를 겨냥해 선양이 야심차게 출시한 관광소주 - 네이버 검색 이미지

1989년 '자도주' 제도가 폐지되면서 '지방주 50% 판매제도'도 지난 90년 40%, 91년 30%로 잇따라 축소된 데 이어, 92년에는 사실상 소주시장의 자유경쟁 체제가 본격화됐습니다.

그러나 '엑스포 소주'가 지역 고급시장을 완전히 석권, 선양이 '향토 소주'에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음을 대내외에 입증해 보일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엑스포 소주는 '지방주 50% 점유율 보장 제도' 폐지에도 불구하고 선양을 명실상부한 지역소주로 자리매김시킨 인기상품이었다. - 네이버 이미지검색

대전세계박람회 지역 공식소주이기도 했던 엑스포 소주는 국내 소주회사 최초로 어깨에 주름이 잡힌 독특한 병으로 특히 인기를 끌었지요. 93년에는 또 선양이 증류식 소주 제조 면허를 취득하고 오동공장(증류식)을 준공, 희석식-증류식 양대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오동공장 준공 - 충청투데이 DB

1995년에는 선양의 최대 히트상품인 '선양그린'이 출시됐고, 이와 동시에 최초의 22도주인 '투투'가 시장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젊은층과 여성층을 겨냥한 이 파격적인 저도주(低度酒)는 종전 25도 시장의 완고한 벽을 뚫지는 못했습니다.

                     25도가 일상적인 상황에서 22도의 파격적 저도주로 출시됐던 '투투'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저도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선양그린은 지난 87년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창당과 그 이듬해 총선 압승 등 지역민심의 '정치적 결집'에 힘입어 폭발적인 점유율을 기록했습니다. 88년 선양의 점유율은 대전·충남을 통틀어 70%를 넘기도 했지요.

그러나 지방주 50% 판매제도를 골자로 한 '주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95년 다시 '자도주'가 되살아났습니다. 중간 도매상들이 다시 의무적으로 자도주 50%를 시장에서 소비해야만 했던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자도주'는 안정적인 점유율을 보장해 주었으나 규모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방소주들은 영업·마케팅의 부재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선양과 충남권 일부 중간 도매상들간에는 갈등의 조짐까지 있었습니다. 중간상의 가족화는 주류판매의 기본인데도 '자도주' 제도가 이를 자각하지 못하게 한 셈이었죠.

갈등의 불씨가 타오른 것은 1996년. 천안의 한 중간도매상이 '판매율을 강제하는 것은 자유경쟁 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을 냈습니다. 이는 결국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이어져 '자도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도매상들이 선양을 공급하지 않으면서 천안, 아산, 당진 등에서 선양의 점유율은 계속 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양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난 98년 선양은 국내 첫 23도 소주인 '선양그린'을 출시했습니다. 진로나 경월 등 대기업들도 23도 소주 출시가 1년여나 늦었던 것을 감안하면 소주의 판도변화를 선양이 주도한 셈이었죠.

     1995년 출시된 선양의 최대 히트상품 '선양그린'. 국내 첫 23도주로 기록되면서 소주시장의 판도변화를 이끌었던 상품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여기에 97년 대선을 앞두고 JP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연합한 이른바 'DJP 연합'을 구축했습니다. 이에 앞서 3당 합당으로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권력을 분할했던 JP가 소위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자 충청권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이 다시 '충청권 핫바지론'을 들먹거렸습니다.

소주소비가 정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다보니 향토소주도 덩달아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자민련의 상징이 녹색인 것도 '선양그린'에는 호재였지요.

이 때문에 선양이 국내 처음으로 소주병의 컬러를 '블루스카이'에서 녹색으로 바꾼 것을 놓고 정치를 이용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지난 94년 선양은 경월그린에 한 달 앞서 녹색병을 출시했습니다. 이는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어느 날 병공장에서 하자품(녹색병)이 무더기로 납품된 일이 있었습니다. 공급물량을 축소할 수 없었던 선양은 고심 끝에 박스당 1∼2병씩 녹색병을 끼워 넣었고, 소비자들은 이를 전략상품으로 오해했습니다. 업소에서는 이 '전략상품'을 아껴뒀다 단골고객에게만 건넸고, 중간상들도 단골 거래처에 녹색병을 덤으로 '서비스'했습니다. '불량품'이 최대 '히트상품'이 된 것이죠.

선양은 정치적 환경과 선양그린의 예상치 못한 대히트로 지난 98∼99년 대전 80%, 충남 65%의 점유율을 기록했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점유율이 5%가 넘었을 정도였죠.

그러나 선양의 최대 위기는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2001년 9월 '주류구매 전용카드'가 전격적으로 도입됐습니다. 외상으로 물량을 공급받았던 중간상들에게 '현금거래'가 시작된 겁니다. 제도 도입을 앞두고 중간상들은 외상으로 물량을 받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고, 선양은 설비부족으로 이 물량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대전·충남권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던 진로가 이 시기에 지역 소주시장을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선양은 앉아서 '텃밭'을 내주고만 꼴이 됐죠.

여기에 3년여를 끌어온 경월그린과의 '그린' 상표권 분쟁으로 양사 모두 '그린'이란 상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선양은 새 브랜드인 '선양새찬'을 급작스럽게 시장에 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경월그린과의 상표권 분쟁으로 양사모두가 '그린'을 상표로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등장한 '선양새찬' - 선양 홈페이지


 *다음편은 <대전사랑 오투린 이야기(3) - 銀소주 특허 옛명성 회복 도전장>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