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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 sans dormir

‘늙은 둔산’은 대세하락기… 5억5천 아파트가 4억8천 급매물 전락

前은행지점장, 내과의사, 대기업 연구원의 힘겨운 ‘脫둔산’ 르포

 

#1

 

 

서울에서 은행 지점장으로 은퇴한 김 모(63) 씨는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뒤 고향인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가 아내와 함께 보금자리로 마련한 집은 서구 둔산1동 목련아파트 138㎡(공용면적·구 42평) 기준층(11층). 지난 2006년 5월이었다. 매매가는 5억 5500만원. 이 아파트의 실거래가가 가장 높았을 때가 바로 이 해 4~6월이었다.

 

김 씨는 서울 아파트를 정리하고 남은 돈을 정기예금, 즉시연금보험 등 안정적인 금융상품에 투자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이자수익과 개인연금 등으로 부족하지 않은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다. 대전생활 6년째 접어든 그의 아내도 무척 만족해했다. 대전의 중심지답게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환경이었다. 문화시설, 병원, 관공서, 금융기관, 대형마트 등이 가까워 둔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올 설 연휴 때 서울에서 온 큰 아들 내외가 도안신도시나 세종시로 이사할 것을 권유했다. 아들이 내세운 논리는 둔산 아파트의 노후화와 그에 따른 이 지역 중상류층의 ‘탈(脫) 둔산’ 현상. 장기적으로는 세종시로 이사하는 것도 검토했지만 굳이 당장의 생활편의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김 씨 부부는 지난달 말 유성구 상대동 도안신도시 9블록 트리풀시티 127㎡(공용면적·구 38평) 아파트를 계약했다. 분양가 3억 4천만 원에 웃돈을 8천만 원(확장비용 포함)이나 줬다. 부부 내외가 생활하기에 충분히 넓은 면적인 데다 아들 딸 부부가 집에 들러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당장은 편의시설이 부족하지만 도안신도시가 둔산을 대체할 거주단지가 될 것이란 확신도 들었다.

 

그런 김 씨 부부가 난처해졌다. 막상 계약금까지 지불하고 이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집이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 김 씨의 아파트의 현 시세 상한가는 5억 2천만 원. 오히려 구매시점보다 3500만원이나 떨어졌다. 리모델링 비용을 합하면 5천만 원 이상이나 빠진 셈이다. 부동산 업소에서는 4억 9천만 원에 팔아주겠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김 씨는 “임대도 생각했지만 전월세 모두 수요자가 없는 실정”이라며 “노후자금을 건드리기는 곤란하고 구매자가 4억 8천만 원이면 적극 고려하겠다고 해 그렇게라도 매도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2

 

 

내과의사 한 모(55) 씨는 서구 둔산1동 크로바아파트에서 7년째 살고 있다. 그의 집은 공용면적 135㎡(구 41평) 기준층(7층). 지난 2006년 1월 5억 2500만원에 산 이 집의 현 시세는 5억 7000만원.

 

한 씨는 자녀 둘을 모두 서울의 대학에 진학시킨 뒤 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원했다. ‘도안신도시냐 세종시냐’를 두고 아내와 갑론을박을 벌인 뒤 최근 웃돈 4500만원을 주고 세종시 첫마을 2단계 아파트를 매입하기로 했다. 계약금까지 치렀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17층 아파트 전용면적 114㎡(구 45평)다.

 

자녀 교육 부담까지 덜었던 터라 더 긴 안목으로 세종시를 선택한 것. 발코니 확장비용, 취‧등록세를 포함하면 4억 5천만 원이 소요될 예정이다. 한 씨는 중장기적으로 둔산의 병원을 정리해 세종시에 병원을 마련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그런데 금강변을 따라 아내와 함께 산책하는 꿈을 꾸던 한 씨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대전의 아파트가 팔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 아파트 값도 시세대로 받을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아래층 아파트가 지난해 10월 5억 7천만 원에 팔린 이후 11월에는 9층 두 채가 각각 5억 6400만원과 5억 6천만 원에 매각됐다. 12월 말에는 옆 라인 같은 층 아파트가 5억 4000만원에 매매계약이 이뤄졌다.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채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게 인근 중개업소의 설명이다.

 

부동산포털 등을 보면 크로바아파트 135㎡형의 시세 상한가는 5억 7000만원으로 일제히 표시돼 있다. 한 씨 집의 경우 이른바 ‘로열층’인데다 발코니 확장까지 시공한 상태. 하지만 한 씨는 5억 4천만 원에도 집이 팔릴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형편.

 

한 씨는 “5억 4천만 원에 팔릴지도 미지수지만 설사 그 가격에 매매가 이뤄져도 인테리어 비용과 취‧등록세를 감안하면 손해를 봐야 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는 중개업소로부터 1천만 원은 더 내려 매각할 생각도 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3

 

대덕특구의 대기업 연구원인 이 모(52) 씨는 지난 2006년 1월 3억 7천만 원을 주고 목련아파트 122㎡(공용면적·구 37평) 7층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했다. 둘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할 시점이었다. 이 씨의 로드맵대로 아들은 탄방중, 충남고에 잇따라 진학했고, 바라던 서울의 대학에도 합격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부모의 도리를 다 했다고 판단한 이 씨는 더 이상 둔산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세종시를 선택했다. 직장과 거리상 멀지 않은 데다 교통망 확충도 예정돼 있어 이 씨에게는 최적의 입지였다.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의 미래가치에도 주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최근 매물로 나온 세종시 첫마을 2단계 삼성래미안 전용면적 101㎡(구 40평) 15층 아파트를 계약했다. 웃돈은 시세보다 1천만 원 낮은 5천만 원만 치르기로 했다. 매도자가 잔금 치를 여력이 없었던 터라 계약 당사자 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덕분이다. 총 매입가격은 3억 8500만원. 이씨는 합법적인 전매시점인 6월 말쯤 잔금을 치르고 이사를 할 계획이다. 금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도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여기 까지는 모든 게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원하는 가격에 집을 매도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의 아파트 시세 상한가는 4억 3500만원. 기준층인데다 리모델링까지 돼 있는 집이어서 부동산 업소에서는 4억 2500만원에 매매 협상을 추진 중이다. 그가 조바심을 내는 건 집을 보겠다는 수요 자체가 없기 때문. 들리는 얘기로는 지난해 12월 말 12층 아파트가 4억 원에 팔린 이후 현재까지 거래도 실종된 상태라는 것.

 

조금씩 매매 호가를 낮춰 잡아 요즘은 3억 9500만 원이면 매수자가 나타날 것 같단다. 이 씨는 “확장비용이나 취‧등록세를 고려하면 시세차익은커녕 손실이 불가피한 실정”이라며 “원하는 가격은 아니라도 매수자가 하루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둔산 A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노후화된 둔산 아파트 소유자들이 도안신도시와 세종시 등 신규 공급물량으로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매물이 쏟아지는 데 매수자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임대도 여의치 않으면서 자금에 여유가 있는 세대는 급매물로 매도하느니 차라리 집을 비워둔 채 이사를 하고 있다”고도 했다. 대전의 강남으로 불리던 둔산1동에 공실 아파트가 속출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