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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 sans dormir

CEO리더십분석 - 김형태 한남대 총장의 '휴머니즘 리더십'

◇김형태의 리더십을 떠올린 이유?

 

 

                      김형태 한남대총장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필자는 <CEO리더십 분석>이란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첫 번째 대상으로 김형태(66) 한남대학교 총장을 떠올렸다. 왜 ‘김형태’였을까? 아마도 그건 그의 변함없는 원칙과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와 대면해 이런저런 얘기를 진지하게 나눴던 건 지난 2008년 1월 말께였다. 그는 제14대 총장에 선출된 직후의 당선자 신분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기독교대학으로서의 정체성과 ‘써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즉 섬김의 리더십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성경의 말씀까지 곁들여 설명했다. 사실 지방대학의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에서 뭔가 대학발전을 위한 역동적인 발상 같은 걸 내심 기대했던 터였다. 실망스러웠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입장에서는 고리타분하게까지 들렸다.

 

4년이 흐른 지난 1월, 그는 다시 한남대 총장에 선출됐다. 이 대학 최초의 동문 총장에서, 연임에 성공한 총장이란 영예까지 안았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한남대가 요즘 언론사에 제공하는 보도 자료를 더 유심히 봤다.

 

그러던 중 이 대학 홍보팀이 서울역과 대전역에 설치한 광고판을 교체했다는 글을 최근 ‘페이스 북’에 올렸다. ‘청소부 아줌마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 대학 환경미화원 김운심 씨와 김승현 총학생회장(광.전자물리학과 4학년)을 모델로 등장시켰다. 신선했다. 이 광고판이 김 총장의 ‘써번트 리더십’을 필자에게 다시 상기시켜줬다.

 

 

한남대가 서울역과 대전역에 설치한 광고판. 실제 이 학교 환경미화원과 총학생회장을 모델로 썼다. 종전 광고판은 배우 강성연과 권상우 등이 모델이었다.

 

한남대의 GCC(Green & Clean Campus) 운동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 김 총장 집무실 앞 액자에 이 운동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새마을운동 구호 같은 행동강령이 걸려있다. 거기에는 ‘창학정신을 실천하는 한남대학생의 생활실천 다짐’이란 제목이 붙여져 있다.

 

캠페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날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겠습니다. 2.만나면 서로 미소 지으며 인사하겠습니다. 3.무감독 시험으로 정직을 실천하겠습니다. 4.담배꽁초와 쓰레기 없는 청정 캠퍼스를 만들겠습니다. 5.버스 안에서 자리 양보로 공익을 실천하겠습니다. 6.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더불어 살겠습니다. 7.국제적인 문제 해결에 앞장서겠습니다.

 

실제 이 운동을 주도하는 건 이 대학 총학생회다. 김 총장은 점퍼 차림으로 아무 말 없이 담배꽁초를 줍거나 시험기간 도서관 자리경쟁을 위해 이른 새벽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아침거리를 나눠줄 뿐이다. 학생들에게 솔선수범하는 총장의 모습을 보여 주는 셈이다. 여름이면 교내 환경미화원들을 초청해 삼계탕을 대접하고, 명절 때면 선물세트를 돌린다. 그러자 여교수들은 미화원들에게 겨울철 양말을 선물했다. 학생회는 하루 동안 여행을 보내드리고 대신 캠퍼스 대청소에 나섰다.

 

‘국제 문제 해결에 앞장서자’는 다소 거창해 보이는 실천구호지만, 학생회는 작은 것부터 실천했다. 최근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참가학생들이 1㎞당 100원씩 기부해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퇴치 기금’으로 250만원을 유엔재단의 한국주재 대표에게 전달했다.

 

김 총장에게 있어 학생들이 국제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유엔재단은 미국 CNN방송의 창설자 테드 터너(Ted Turner) 회장의 주도로 설립됐다. 한국인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유엔재단의 활동에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반 총장의 조국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국제망신이 아니냐는 것. 그는 “우리나라는 대학생까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해야 언권(言權)이 서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캠페인에는 한남대를 비롯해 숭실대, 영남대, 대한약사회, 서울고검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이웃돕기도 연습해 봐야 하게 된다. 자선도 연습”이라며 “작은 성의로도 얼마든지 국제 문제에 동참할 수 있다”고 했다

 

◇김형태의 리더십의 요체?

 

 

        김 총장이 수요예배에서 한 학생의 발을 닦아주는 세족식을 갖고 있다. 세족식에는 이 대학 교수들이 모두 참여했다.

 

김 총장 리더십의 요체는 ‘백 투 더 베이직(Back to the basic)’, 즉 원형회복이다. “대학설립 때의 창학정신으로 돌아가는 게 대학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지향점이다. 그는 “100년이 지나도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게 한남대 총장으로서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했다.

 

그는 “불변성과 가변성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대학의 설립정신을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적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가변 요소를 거부하면 낙오자가 된다”고 했다. “에볼루션(Evolution, 진화)을 거부하면 결국 레볼루션(Revolution, 혁명)을 당한다”는 표현도 썼다. 그러면서 “정체성을 지켜 가면서 유사 이래 가장 어렵다는 대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전환점)을 남기고 떠나는 게 나의 마지막 미션(사명)”이라고 했다.

 

김 총장은 이런 얘기를 옷과 효(孝)의 가치 등에 빗대 설명했다. 그는 “옷을 입는 건 변할 수 없지만 나이와 계절에 따라 바꿔 입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효의 방법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그 정신은 계승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그는 4년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김 총장은 그러면서 “가치론적 목표와 실용적 목표를 같이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남대에 입학한 사람을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양성하는 게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론적 목표라면 한남대를 졸업한 사람을 모두 직장에 취직해 내보내는 건 실용적 목표”라고 했다.

 

김 총장은 이런 목표를 구성원들이 이해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리더십의 정체를 “선(善) 의지를 자극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필자는 곧 여기에 ‘휴머니즘 리더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리더십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베드로의 발 닦아주던 예수의 리더십이 바탕

 

 

                        학생들과 함께 사랑의 연탄나누기 행사를 하고 있는 김 총장

 

김형태 리더십의 바탕은 기독교적 섬김의 리더십, 즉 ‘써번트 리더십'이다.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던 예수의 리더십이고, 한남대의 창학이념에 기초한 리더십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7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다. 동생 넷이 목사일 정도로 교역자 집안이다. 그도 교회 장로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경 정신대로 살자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얘기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총장이 아닌 총종(總從)이라 부른다. 총장은 모든 구성원을 섬기는 자리라는 뜻이다. 학장은 학종이고, 처장은 처종이니 그는 머슴 중에 상머슴인 셈이다. 그는 “크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낮은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자를 섬겨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는 서울대 총장도 아니고 충남대 총장도 아니다. 대학 설립정신대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리더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 선교사들이 희생하며 대학을 설립한 건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국가를 섬기는 한국인을 양성하고자 한 것”이라며 “서울대에서 이렇게 하니 한남대도 똑같이 하자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총장으로서 설립정신을 일관되기 유지해야 하는 건 사명감”이라며 “변화의 시대인 건 분명하지만 원칙적인 방향은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소년 김형태만을 위한 14년간의 장학금

 

 

김 총장은 한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사진은 1976년 총장실 앞에서 촬영됐다. 그는 이 때부터 리더를 꿈꿨을 것이다.

 

김 총장의 리더십 형성에는 초등학교 은사들의 헌신적인 베풂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김 총장은 부지런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6년 간 단 하루도 학교를 빠진 적이 없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면서 학업우수상과 개근상을 받았다. 인정을 받아 뿌듯해진 소년은 무거운 책임감 같은 걸 느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누님 결혼식이 있었는데도 소년은 학교에 갔다. 청첩장이라도 선생님께 보여 주면 결석처리를 면할 만도 했을 텐데 말이다. 중학교는 25리(10㎞)를 매일같이 걸어 다녔다. 그래도 소년은 3년 개근을 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담임선생님의 지도아래 방과 후 1~2시간씩 보충수업이 이뤄졌다. 그런데 소년은 이 수업을 빠져야 했다. 수련장 살 돈마저 없었기 때문. 소년은 중학교 진학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이 소년의 집을 찾아왔다. 가정방문 다음 날, 선생님이 소년을 교무실로 불렀다. 공부도 잘 하는 아이가 중학교에 못 간다는 게 안타깝다며 선생님이 전형료를 선뜻 내줬다. 소년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논산 대건중에 입학했다. 입학성적은 전교 3등.

 

다행이 그 해부터 입학 10등까지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생겼다.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하지만 책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담임선생님의 주도로 소년만을 위한 장학회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김형태장학회’. 노성초등학교 교장을 비롯해 15명의 선생님 모두가 참여했다. 선생님들은 월급에서 600원씩을 뗐다. 소년은 그렇게 매달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의 휴머니즘 리더십은 베푸는 삶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ㄷ. 학생들이 환경미화원들을 여행 보내드리고 대신 교정 청소를 했다.

 

김형태장학회는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년이나 유지됐다. 장학회 창립 멤버인 선생님들은 매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그렇게 장학회를 이어갔다. 그동안 교장도 세 번이나 바뀌었다. 나중에는 소년을 직접 가르친 선생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장학회는 이미 그 학교의 전통이 돼 있었던 셈이다.

 

김 총장은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은장학기금’을 조성, 이 학교 졸업생을 3명씩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는 “과분한 도움을 받았다. 남의 은혜로 산 사람이니 반드시 갚자. 사람 하나 길렀더니 의미가 있구나 하는 보람은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은혜를 입고 사랑을 받으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생긴다”고도 했다.

 

◇ 정봉욱 장군에게서 '총장학'을 배우다

 

 

김 총장은 기독교대학의 설립정신을 토대로 학생들이 국제문제 해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프리카에 PC보내기, 아프리카 말라리아 퇴치 기금 조성 동참 등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다.

 

청년 김형태는 1970년 입대했다. 논산육군훈련소에서 사병으로 복무를 했다. 처음에는 지휘부 사역병으로 있었다. 6개월여가 지났을 때 정봉욱(89) 장군이 소장으로 부임해왔다. 정 소장은 인민군 대령 시절 전향했다. 삼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강의를 한 번 하면 8시간을 쉬지 않고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김 총장은 “총장학(總長學)을 별도로 배운 적이 없지만 군대에서, 정 장군님을 지켜보면서 리더십을 배웠다”고 했다.

 

정 장군은 훈련병들을 정신 교육시키면서, OHP 교육 자료를 활용했다. 정 장군이 한자로 초고를 쓰면 한자를 전공한 사병들이 옮겨 썼는데 재대로 읽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서체가 좋아 뽑혀온 김 일병이 70~80%를 술술 읽었다. “제대로 할 놈이 여기 있었네”라는 정 장군의 말 한 마디로 그의 보직이 훈련소장 비서병으로 바뀌었다. 청년은 엑스레이 촬영했던 폐 필름을 닦아서 장군의 초고를 정서했다. 그렇게 만든 자료가 전역할 때까지 무려 6300장.

 

정 장군은 신문기자를 하다 입대한 청년을 무척이나 아꼈다. 환후가 위중해진 청년의 부친은 정 장군의 배려로 훈련소 병원으로 옮겨졌다. 부친은 영관장교 치료받는 이 병원에서 1주일간 치료를 받다가 작고했다. 장례식은 본부중대 주관으로 치러졌고, 군악대가 진혼곡을 연주했다.

 

정 장군은 김 총장이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줬다. 김 총장은 “아흔이 가까운 연세인데도 모택동전집을 읽고 강의를 하실 정도”라고 했다. 청년에게 정 장군은 무엇보다 청렴한 지휘관이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윤군훈련소장 1년만 하면 빌딩 한 채를 산다고 할 시기였다. 이를 근절하기 위해 정 장군은 가톨릭대 다니다 온 사제준비생을 뽑아 분류과에 배치했다. 신앙심으로, 양심적으로 부대배치를 하라는 뜻에서다. 이도 못미더웠는지 직접 초안까지 작성했다.

 

 

                             2008년 고국을 방문한 반기문 총장 환영행사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잔반을 인근 주민들이 가져다가 돼지에게 먹이곤 했는데 일정한 양대로 새끼 돼지 한 마리씩을 받았다. 잔반과 금품을 교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받은 새끼 돼지를 취사장 근처에서 길러서 매달 합동 생일잔치를 열었다. 100원씩 내고 영화를 관람하던 연무관, PX(매점) 이익금은 계급별로 봉투에 넣어서 격려금으로 줬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부정하지 말라는 뜻에서다. 김 총장은 “부대 운영비로 소장이 써도 되는 돈까지 한 푼 쓴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또 “정 장군님은 위법에는 단호하고 비리에는 용서가 없었다”며 “대신 업무를 잘 몰라서 하는 잘못은 용서했다”고 했다. “당장은 혹독하게 부하를 대해 인기가 없었지만 그게 공동체를 살리는 길임을 알게 됐다. 당장 인기만 보면 그 공동체는 절단이 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아니라 훗날 역사에서 인정을 받겠다는 게 리더의 자세”라고 했다.

 

그는 “군 복무를 대학원 다닌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며 “군대는 국방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국민교육으로서의 기능도 한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