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에게 한 학기 1인 평균 324만원의 장학금을 주는 대학, 행정학과를 신설하고 7년 만에 행정고등고시 합격자를 3명이나 배출한 대학, 졸업생 10명 중 1명 이상을 해외 유명대학원에 유학 보내주는 대학, 2006년 첫 졸업식 이후 매년 지역인재추천 6~7급 공무원 합격자를 배출하는 대학,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연구 사업에 선정돼 10년간 80억 원을 지원받는 대학, 교육과학기술부가 주관하는 교육역량강화사업에 5년 연속 선정된 대학….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에 위치한 금강대학교(金剛大學校) 이야기다. 대한불교 천태종(天台宗)이 중창조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의 유지를 받들어 2002년 세운 대학이다. ‘작지만 강한 대학’이 뭔지를 보여 준 이 대학이 7일 개교 10주년을 맞았다.
이 대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불교학에 기반을 둔 인문학의 세계적 대학”이다. 이는 철학에 눈을 뜬 20살 평범한 공대생의 삶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어느 날 우연히 철학 강의를 도강(盜講)하고는 45년 간 ‘한국철학의 세계화’라는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이야기다. 불교를 공부하지 않고는 한국철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청년은 지금 백발이 수북한 노(老)학자가 돼 있다.
그런 그가 금강대를 이끄는 최고경영자가 된 것은 필연(必然)이고 종단(宗團)의 예지(叡智)다. 종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소수정예 교육으로 특성화한 대학이니 그는 한 걸음 종착역에 근접해 있는 셈이다.
그는 정병조(鄭柄朝·65) 총장이다. 정 총장을 계룡산에서 뻗어 나온 향적산(香積山) 중턱의 금강대 교정에서 만났다.
고려대 공대 2학년이 우연히 철학 강의 듣고
한국철학 세계화 꿈꿔 “원효․의상? 불교부터!”
웬 걸 친구는 유명한 철학교수 강의가 있다며 그를 잡아끌었다. 친구와 옥신각신 끝에 결국 강의실로 향했다. 도강 신세인 터라 맨 뒷자리에 앉아 교수를 기다렸다. 그 교수는 고(故) 열암(洌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 선생이다. 선생은 노자의 <도덕경>과 칸트를 오갔다. 칠판에 한자를 쓰다가, 독일어, 영어를 썼다. 내키지도 않았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의 머리를 때린 건 선생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선생은 “한국철학을 세계화시키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며 강의를 마쳤다. 20살 공대생은 이런 생각을 했다. ‘측우기, 금속활자가 서양보다 몇 년 빠르다고 배우며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나. 한국철학도 세계적 위상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게 한국철학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다.
서점에서 한국철학에 대한 책을 이것저것 사서 읽었다. 하나하나 개념을 이해하려 했지만 벽에 부딪쳤다. ‘불교를 모르면 한국철학을 이해할 수 없겠구나! 하긴 원효와 의상이 모두 중이 아니던가!’ 그 때 그는 불교의 ‘ㅂ’자를 처음 입 밖으로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태신앙이었다. 집안사람 대개가 목사 아니면 장로, 권사였다.
그는 무작정 종로5가에서 동국대까지 걸어갔다. 그리고는 학적과에 입학문의를 했다. 학적과 직원은 그에게 “뭣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고려대 공대생이라고 했더니 ‘미친놈’ 취급을 하는 눈치다. 그러면서 “편입시험을 보라”고 했다. 그는 ‘편입생’이란 말 자체가 싫었다. 동국대 후기 입학시험까지는 1개월 남짓 남아 있을 때였다. 다른 과목은 만만했는데 영어, 수학은 영 자신이 없었다.
고민을 하면서 걷노라니 을지로 4가에 와 있었다. 눈에 SPS학원이란 간판이 들어왔다. 그는 학원 상담교사에게 속성으로 입학시험을 준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속성이라도 석 달은 공부를 해야 한단다. 세 달치 돈을 내고 국․영․수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그렇게 인도철학과에 합격했다. 67학번이니 이 학과 2기생이다.
개종 안 한다 설득,
목사·장로 집안서 동국대 철학도 변신
입학시험은 합격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온 집안이 들고 일어났다. “기독교집안에서 잘못된 아이가 나왔다”며 난리가 났다. 집안 어르신들은 그나마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던 그의 선친을 압박했다. 그는 일가친척이 다 모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절대 개종(改宗)은 안 하겠습니다. 공부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제발…”
인도철학과의 입학정원은 20명이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됐더니 다들 법학과니 경영학과로 전과해버렸다. 8~9명이 남았는데 그만 속인(俗人)이고 나머지는 모두 스님이었다. 주말이 되면 친구 절에 가서 놀고, 방학이면 친구 절에 가서 살았다. 배우는 게 불교이고 친구가 스님이니 개종을 안 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애초부터 지켜질 수 없었다. 4학년 쯤 됐을 때 그는 스스로 느꼈다. ‘내가 불자가 됐구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그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그는 불교학으로 성공해보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인도철학과를 선택한 건 잘 한 일이었다. 당시 교수들은 고대 인도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처가 인도에서 태어났으니 인도에서 쓰던 고전어를 알아야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터다.
동국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소장학자로 불교학계에 데뷔한 그는 불교의 원류를 파헤치는 데 몰두했다. 석가의 불교는 무엇인가, 중국 불교와는 어떻게 차별화되느냐가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또 한국불교는 어떻게 변류했는지, 불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는 과정 등에 그의 초기 저술이 집중됐다. <인도철학사상사>, <인도의 고전>, <바가바뜨기이타와 법화경의 비교연구> 등이다.
그가 50대에 접어든 1990년대는 한국불교가 현대화의 물결에 휩싸이던 때였다. 불교계의 화두도 세계화였다. 중견학자로서 그는 한국불교를 어떻게 하면 현대화할 수 있을지에 천착했다. 그의 저술도 불교의 현대화, 계율의 현대적 해석 등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2000년대 이후 원로학자로서 그는 한국불교를 어떻게 하면 세계적 위상으로 위치시키느냐에 매진했다. 영어로 저술활동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철학의 세계화가 평생소원”이라던 열암 선생의 염원이기도 했다. 문광부에서 <Korea Background Series>를 발간했는데 그 첫 번째 권이 그가 쓴 <한국의 종교>다. 그는 이 책에서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 기독교 등을 모두 다뤘다. <History of Korean Buddhist Thought(한국불교사상사)>, <Master Wonhyo(원효성사)> 등도 영문 저술이다.
동국대 교수시절 그는 종교인연합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한신대 김경재 목사, 서강대 김승혜 수녀, 성균관대 최근덕 교수가 각각 개신교, 가톨릭, 유교를 대표했다. 불교에서는 그가 참여했고, 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 교수가 함께 했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씩 모여 토론을 벌였고, 공동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령 목사, 월주 스님이 젊은 학자들이 수고한다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들은 수십 년간 종교를 초월한 사회운동 시민운동에 앞장서온 우리 사회의 거목이기도 하다. 이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밥 사먹으라고, 책 내라고 돈까지 줬다. 그는 “앞으로 후배들이 이런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흔히 상생(相生)이란 말을 쓴다. 종교가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공동의 가치를 개발해 같이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응용불교’ 새 지평 개척
한중일 불교교류 황금기 열고 한국불교 세계화 나서
“미래의 불교학은 응용불교 쪽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했던 그는 금강대 총장에 취임하고 응용불교학과를 신설했다. 현대사회에서 야기되는 복잡한 갈등의 실타래를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결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는 셈이다.
그는 “아직은 낯설고 생소하겠지만 불교경제학, 불교사회학, 불교심리학, 불교윤리학 등을 개척해 이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류의 고뇌가 무궁할수록 응용불교의 영역 또한 무한의 공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불교가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지 사회가 불교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고도 했다. 내년 3월에는 불교특수대학원도 개설할 예정이다.
한국불교 발전과 세계화를 위한 행보도 발 빠르다. ‘고려대장경 천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상월원각대조사 탄신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성공리에 치렀다. 지난 6월에는 중국 런민(人民)대, 일본 도요(東洋)대와 함께 ‘불교의 동아시아적 변용’이란 주제로 공동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들 세 대학은 향후 10년간 매년 학술대회를 함께 열기로 했다. 동아시아 불교교류의 황금시대를 새롭게 열었다는 평가는 이 때문이다.
그는 “SCI급 논문을 많이 내고 인용빈도가 높아져야 세계 유수의 인문학 대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금강대에서 나오는 불교잡지와 저술도 되도록 영어로 출판하고 싶다”고 했다.
지역사회의 인문학 메카로서의 역할도 자처하고 나섰다. 지난해 논산과 올해 상반기 계룡에서 열었던 ‘금강아카데미-인문학 시민강좌’를 지난 9월부터는 천안에서 개최하고 있는 것. 정 총장은 지난 9월 5일 ‘한국인의 종교수용,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첫 강연을 펼쳤다. 그에게 시민강좌를 압축해서 들려달라고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교학에 기반 둔 인문학의 세계적 대학 만드는 게 삶의 종착”
“우리나라 인구의 60% 정도가 종교인이다. 사람이 왜 종교를 갖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구원받기 위해, 해탈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쓰지만 일반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정말 행복하려면 종교를 믿는 태도가 건전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수용 행태에 문제가 있다. 빈곤층의 종교수용 태도는 대개 종교적 신념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데 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종교적으로 풀어보려는 것이다. 중산층은 종교의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절이나 교회에 가서 귀를 씻는다. 착해지는 기분이 든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권층은 종교를 액세서리쯤으로 여긴다. 필요에 의해 종교를 바꾼다. 모든 종교에 관대한 척 위선을 보인다. 지하철 요금이 1200원에서 1300원으로 올라 서민들은 난리인데 이들은 관심도 없다. 택시타면 되고 외제차 타면 그만이다. 이들이 진짜 무서워하는 건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예수님께 비는 것이다. 죽어서도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전하게 믿는다는 건 어떤 것이냐? 우리나라는 종교전쟁의 무풍지대라고는 하지만 개신교가 옳다, 불교가 옳으냐를 따지는 건 전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내가 믿는 종교를 실천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다른 종교를 비판할 시간이 어디에 있나? 모든 종교인들은 각자 표방하는 진리의 세계에 얼마나 가까이 근접하느냐를 가지고 승부해야 한다. 사당이나 교회 수로 경쟁하면 안 된다. 목탁치고 산 속에 있으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부처님의 진리에 얼마만큼 다가서느냐, 또 이를 사회에 어떻게 사회에 환원시키느냐가 미래 불교다. 믿는데 그치지 말고 현실에 응용해야 한다.”
정병조 총장은?
1947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 교동초, 서울사대부중, 서울사대부고를 나왔다. 고려대 공대에 65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 67학번으로 입학했다. 영남대 철학과에서 문학석사를, 동국대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부터 31년간 동국대 윤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3년간 인도 네루대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동국대에서 교무처장,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을 지냈다. 현재 불인상(不仁賞) 심사위원장, (재)보덕학회 이사 겸 감사, 불교연구회 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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